[이순원의 세상풍경] 할아버지의 밤나무

입력 2015-12-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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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얘야, 첫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단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 해를 살다 가는 풀들의 세상에서나 있는 일이란다.”

“밤 한 알을 화로에 묻으면 한 사람의 입이 즐겁고 말지만, 그걸 땅에 묻으면 백년을 두고 화로에 묻을 밤이 나온단다.”

어릴 때 늘 할아버지에게 듣던 말이다. 실제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뒷마당에는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이다. 할아버지는 밤나무 외에도 평생 집 안팎에 참으로 많은 나무를 심었다. 가을마다 수백 접의 감이 열리고, 자두나무와 앵두나무, 석류나무가 울타리를 대신했다.

할아버지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한 집안의 살림을 맡으며 결혼했다. 신부는 한 살 어린 열두 살이었다. 결혼하던 해 두 사람은 산에서 밤 다섯 말을 주웠다. 어린 신랑과 신부는 식량이 떨어져 냉이뿌리와 칡뿌리로 고픈 배를 달래면서도 가을에 주운 밤을 먹지 않고 이듬해 봄 민둥산에 그것을 심었다.

민둥산에 밤을 심은 어린 신랑과 어린 신부가 없었다면 밤나무로 울창한 숲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집 뒷마당에 서 있는 밤나무가 백년도 넘는 긴 시간 동안 매년 굵은 밤알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 데에는 그곳에 씨밤을 심어주고, 그것을 보살펴 준 어린 부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집터를 확장할 때에도 할아버지는 다들 베어내라는 그 나무를 베어내지 않았다. 이미 온 산이 밤나무 숲을 이루어 그 나무 한 그루가 없어도 집안 살림엔 그다지 아쉬울 게 없을 때인데도 그랬다. 그 나무를 베어버렸다면 지금과 같은 커다란 밤나무가 시골집 뒷마당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사람과 나무 사이에도 우정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혼자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지혜를 얻어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민둥산에 밤 다섯 말을 고스란히 심어 그곳을 밤나무 산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삶의 지혜일 뿐만이 아니라 나무와 자연을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들은 아직도 할아버지의 분신처럼 집안과 동네 안팎에 남아 그곳에 갈 때마다 우리를 반긴다.

집안의 아이들도 그 나무를 할아버지 나무<사진>라고 부른다. 두 사람이 안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몸집이 커다란 그 나무는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아오느라 밑동도 썩기 시작하고 중동도 부러져 나가 삶의 기력을 다한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되었다. 아마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만 아니었으면 벌써 베어졌을지도 모른다. 온 식구가 그 나무를 할아버지의 분신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겨울이 가고 봄이 되면 다 죽은 듯싶은 나무에서 어김없이 새순이 돋고 새 잎이 나오고 새 가지가 나와 다시 한 광주리의 밤알을 맺는다.

나무는 사람들이 자신을 아껴주는 만큼 더욱더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베푼다. 시골집 뒤에 있는 할아버지 밤나무만이 아니다. 들판에 흉년이 들 때면 평년보다 더 많은 도토리를 준비하는 참나무, 예쁜 꽃과 열매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과실나무 등 나무는 매해 쉬지 않고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세상에 더욱 많은 선물을 놓고 간다. 나이 든 나무를 보면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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