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끝나는 날까지 어제 몰랐던 걸 오늘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늘 공부하게 된다. ‘관객에게 미안하다. 오늘 이거 알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매력이라 연극을 계속 한다.”지난 11월 4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에서 열연을 펼쳐 ‘역시 연기의 신’이라는 찬사를 끌어낸 74세의 김혜자다.
2시간 넘게 엄청난 대사를 소화한 연극 ‘잘 자요, 엄마’를 7월 3일부터 8월 30일까지 출연한 뒤 10월 30일부터 11월 15일까지 뮤지컬 ‘서울 1983’무대에 오른 이는 바로 74세의 나문희다. 젊은 배우들도 소화하기 힘든 강행군이다.
이처럼 2015년 을미년 올해는 연극 등 공연무대에서 신중년 배우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71세의 손숙은 1990년 초연에 이어 지난 11월 12일부터 12월 6일까지 상연한 모노드라마 ‘그 여자’에 출연했다. 손숙은 올해 ‘어머니’‘3월의 눈’‘벚꽃 동산’‘키 큰 세 여자’‘그 여자’등 5편의 연극을 소화했다. 젊은 배우들이 엄두도 못 낼 엄청난 활동이다. 80세의 이순재는 영화와 드라마를 소화하면서도 매년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 올해도 무대에 섰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지난 2일부터 막이 올라 28일까지 상연하는 연극‘시련’의 주연으로 나서고 있다. 신구(79)와 박근형(75) 역시 올해 연극 ‘3월의 눈’에 출연해 연륜이 묻어나는 진정성 있는 연기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신중년 연극배우 대표주자 윤석화(59) 역시 지난 7월 서영은 동명 소설을 모노드라마 로 만든‘먼 그대’를 통해 관객과 만났다. 윤석화는 연출, 연기, 희곡을 맡아 관객과 전문가의 좋은 평가를 끌어냈다. 지난 5~6월 상연했던 연극‘친정엄마’역시 신중년 여자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력으로 중장년 여성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친정엄마’주연은 베테랑 배우 박혜숙(66)과 조양자(60)였다. 이 작품 초연 때에는 고두심(64), 강부자(74) 등이 주연으로 나서 ‘친정엄마’선풍을 일으켰다.
드라마와 영화에 전념했던 배우 노주현(69)은 ‘죄와 벌’(1976년)이후 39년 만에 지난 4월 2인극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주인공 모리 역을 맡아 관객과 만났고 중견 탤런트 박정수(62)는 지난 3월‘다우트’를 통해 연기 생활 43년 만에 처음으로 연극무대에 올랐다. 노주현과 박정수처럼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 주력해온 신중년 배우들이 속속 연극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들뿐만 아니다. 수많은 신중년 배우가 연극 무대에서 연기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지난 5월 초 개막한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멜로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 공연 작가가 전쟁 통에 헤어진 옛 연인을 찾는 외할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알게 되는 이야기를 담을 연극으로 김승욱(51) 등 신중년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섰다.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며 대중성이 높은 조재현(50)은 11일 개막해 2016년 2월 16일까지 공연하는 ‘에쿠우스’무대에 오른다.
이 밖에 박정자(73) 전무송(73) 김명곤(63) 정동환(65) 등이 꾸준히 연극무대에 올라 젊은 연기자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깊은 연기의 맛을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2015년 올해는 연극무대에서 수많은 신중년 50~70대 배우가 주연으로 나서며 강력한 흥행파워까지 발휘했다. 이는 영화와 드라마에선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선 40~50대만 접어들어도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60대에 접어들면 밥을 먹는 장면에만 나오는 ‘식탁용 배우’로 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50~70대가 주연으로 나서는 경우는 특집극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50~70대 신중년 배우들이 영화와 드라마의 주연으로서 설 자리를 잃는 것과 달리 연극무대에선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 특성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에선 감독의 역할이 절대적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극본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좌우한다. 이에 비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배우의 역량과 연기가 연극의 완성도와 흥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다진 빼어난 연기력과 캐릭터 소화력을 가진 배우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중년 배우들이 연극무대에서 당당히 주연으로 나서는 이유다.
이순재는“연극은 배우의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번 연극무대에 오르지만 늘 두렵다”고 말했다.
또한, 연극을 통해 관객과 직접 호흡하는 것을 선호하는 신중년 배우들이 많아진 것도 연극의 신중년 배우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올해‘잘 자요, 엄마’‘서울 1983’을 통해 관객과 만난 나문희는 “배우 연기에 대한 반응이 관객에게서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관객의 숨소리도 연기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연기입니다. 관객과 배우가 펼쳐내는 한편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감동이지요. 이런 점 때문에 힘은 들어도 연극을 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문희를 비롯한 수많은 신중년 배우들이 연극무대에 지속해서 오르는 이유다.
영화와 드라마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소재와 장르, 내용의 연극이 선을 보이고 창작극에서 번역극까지 여러 가지 연극 작품이 관객과 만나기 때문에 연극 무대에는 신중년 배우들의 설 자리가 많은 편이다.
최근 들어 신중년층 연극 관객 증가도 신중년 배우들의 연극무대 출연 붐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연극 극장을 운영하고 연극 작품을 제작, 출연하는 조재현은 “근래 들어 연극을 보는 신중장년 관객들이 급증했다. 이들을 겨냥한 연극들이 많아지면서 신중년 배우들이 설 무대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