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전 이사장은 산수(傘壽)의 나이를 바라보는 현재까지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로서 학술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카이스트 경영대학 연구실에서 지난 22일 홍 전 이사장을 만났다. 빽빽한 책장 대신 국내·외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로 뒤덮여 있는 연구실이 그를 설명했다. 56년차 증시 원로인 그에게 현역시절 후일담과 한국 자본시장의 나아갈 길에 대해 물어봤다.
◇“현재현 회장에게서 선물시장 지켜내… 노조위원장이 술을 다 사더라” =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이력을 가진 홍 전 이사장이지만, 거래소 이사장 6년 기간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현재현 전 동양증권 회장과 힘 싸움을 벌인 끝에 선물거래소를 개설한 일에 대해서는 “재임기간 가장 보람을 느낀 부분”이라고 회상했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말할 수 있는 파생상품시장 개설의 ‘비하인드 스토리’인 셈이다.
홍 전 이사장은 파생상품의 개념이 보편화하기 전인 1990년대 초반이었지만 물밑에서는 거래소 개설 권한을 둘러싼 힘 싸움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고 했다. 현재현 회장은 업계 관계자들과 함께 ‘금융선물협회’를 발족하고 선물거래소 설립 권한을 얻기 위한 치밀한 준비를 했다. 현 회장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홍 전 이사장은 “협회가 사실상 몇 사람에 불과한 개인 소유인데 선물거래소 개설권을 협회가 갖게 되면 이들이 거래소를 갖게 되는 셈”이라며 “그것은 정말 나쁜 마음이고 부정이다. 어떻게 개인에게 주느냐. 이것을 막는 데 정말 혼신의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홍 전 이사장은 ‘왜소한 국내시장 육성을 위해서도 선물과 현물을 거래소가 개설하는 것이 좋다’는 논리로 맞섰다. 천신만고 끝에 1995년 선물거래법이 홍 전 이사장의 논리대로 통과됐다.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시킨 결과였다. 홍 전 회장은 이때 거래소 노조위원장이 자신에게 술을 샀던 일을 회상하며 “노조위원장에게 술 얻어먹는 최고경영자는 정말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파생상품 세계 1위는 웃기는 소리… 오히려 지금이 보통 수준” = 우여곡절을 거쳐 만들어낸 파생상품 시장은 한때 거래량 세계 1위 자리까지 차지하며 거래소의 ‘보배’가 됐다.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파생상품 거래가 급증하자 이와 관련한 거래소의 매출도 급격히 늘었다. 거래소 직원과 업계 관계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홍 전 이사장 본인은 이에 대해 “웃기는 이야기”라며 달갑지 않게 평가했다. 당시 ‘일확천금’을 노리는 개미들이 많아진 데 대해 ‘일종의 투기장이 됐다’는 시각에서다. 홍 전 이사장은 “선물·옵션시장이 너무 빨리 커진 것도 문제가 있었다. 너무 과열되고 부풀려졌다”며 “불필요한 규제만큼이나 쏠림이 심한 것은 좋지 않다. 너무 들떠도 문제고 깨지는 사람도 많았다. 투기로 몰려다니는 것을 환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현재 파생상품시장 거래량 수준에 대해 홍 전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세계 경제력 순위가 12위 정도 된다고 하면 선물이든, 파생시장이든, 채권시장이든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며 “얼마 전 홍콩 H지수 급락에 따른 국내 ELS(주가지수연계증권) 대규모 손실 사태도 결국 ‘쏠림’이 문제가 돼서 일어난 일”이라고 지적했다.
◇“거래소 지주회사 전환은 ‘절대 필요’… 직원들 안주해선 안 돼” = 거래소의 ‘OB’로서 홍 전 이사장이 거래소의 현안 등에 가진 견해에 대해서도 물었다. 우선 거래소의 지주회사 전환 방안을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데 대해 홍 전 이사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며 “홍콩, 싱가포르, 일본 등 아시아 선진 거래소와 경쟁하려면 우리도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거래소 직원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홍 전 이사장은 “지금까지 정부가 간섭도 했지만 반대로 보호해주던 측면도 있는 것”이라며 “세계화한다는 것은 경쟁을 의미한다. 거래소도 국내 독점체제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어 그는 대체거래소(ATS) 설립 논의와 관련해 “지금은 얘기만 나오고 있지만 경험상 이런 것은 금방 나오게 돼 있다”며 “거래소가 경쟁을 의식하지 않으면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홍 전 이사장은 재임 당시 직원들을 들볶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의 호통이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내가 거래소에 무슨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면서 “당시 거래소 직원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피동적이었다. 질타도 하고 격려도 했던 것은 직원들을 독려해서 기관이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래소 무슨 부서에 근무하는 것이 월급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경력을 쌓는 과정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 선진국지수 편입 중요… 장기적으로 중국증시 의존도 줄여 가야” = 홍 전 이사장은 거래소를 나온 1999년부터 중국 공부에 몰두했다. 중앙대, 서강대 등 거쳐 지금 몸담은 카이스트까지 그의 강의 분야는 중국시장이었다. 이 때문에 국내 자본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는 말에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답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홍 전 이사장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산업구조와 증권시장이 중국과 너무 연결돼 버렸다”면서 “연초에도 나타났듯 중국에서 충격이 발생할 때마다 막대한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우리 증시도 좀 더 세계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더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우리보다 선진시장인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을 열심히 찾아 긴밀함을 높여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 전 이사장은 단기적으로는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선진국 지수 편입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지목하고, 이를 위해 금융당국이 두 가지 선결요건(외국인 투자자 신고제 폐지, 24시간 환전 가능한 역외시장 개설)을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거래소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관련해 “거래소라는 것은 평소에는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고, 별로 큰 이익단체도 아니지만 위기 시그널이 오면 많은 중요한 일을 하는 기관”이라며 “거래소라는 기관에 대해서도 단순하게 증권거래소 수수료 장사로 보거나, 투기장, 일하지 않는 기관으로 보는 시각은 모두 옳지 않다는 말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