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끄물끄물한 날 부침개

입력 2016-02-1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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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 겨울비는 술비’라는 속담이 있다. 봄에는 비가 와도 바빠 일을 해야 하니 ‘일비’요, 여름에는 낮잠을 즐기기 좋으니 ‘잠비’, 가을에는 햅쌀로 떡을 해 먹기 좋아 ‘떡비’, 겨울에는 농한기라 술 마시며 놀 수 있으니 ‘술비’라는 의미다. 계절에 따라 자연과 더불어 생활해온 우리 조상들의 낙관적인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절로 웃음이 난다.

며칠 전 단비가 내렸다.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아 전국 곳곳에서 시름이 크던 터라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마른 가지만 남아 갈색으로 변한 산은 오랜만에 물기를 머금었다. 깊은 겨울 가뭄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때를 알고 내린 그야말로 꿀비요, 감우(甘雨)였다. 두보가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읊은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 아니었나 싶다.

비나 눈이 내리기 전 하늘이 몹시 흐려지거나, 불빛 따위가 밝게 비치지 않고 몹시 침침해질 때 ‘끄물끄물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꾸물꾸물하다’로 잘못 쓰는 이가 많다. 꾸물꾸물하다는 매우 느리게 자꾸 움직이다, 게으르고 굼뜨게 행동하다라는 뜻으로 사람이나 동물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같은 의미의 말 ‘꾸물거리다’를 생각하면 헷갈릴 이유가 없다. 행동이 굼떠 느릿느릿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꾸물거리니!”라고 하지 “왜 그렇게 끄물거리니!”라고 야단치지는 않는다. 날씨나 하늘의 상태를 이야기할 때는 끄물끄물하다, 끄물거리다, 끄무레하다 등으로 써야 한다. ‘꾸무리하다’는 끄무레하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날씨가 쌀쌀하고 끄물거리면 “몸이 찌뿌드하니 찜질방에 가자”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찌뿌드한 몸은 없다며 거절한다(사실 찜질방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살이나 감기로 몸이 조금 무겁고 거북할 때는 찌뿌드드하다, 찌뿌듯하다, 찌뿌둥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찜질방을 좋아하는 친구가 ‘찌뿌드하다’에 ‘드’를 더 넣어 ‘찌뿌드드하다’로 바르게 말한다면 함께 가서 수다를 떨 용의는 있다. 표정이나 기분이 밝지 못하고 조금 언짢거나, 비나 눈이 올 것같이 날씨가 조금 흐릴 경우에도 이 표현들을 쓴다.

‘찌뿌둥하다’는 잘못된 표기가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겠다. 몇 년 전까지 찌뿌둥하다는 ‘찌뿌듯하다’의 잘못, ‘찌뿌듯하다’의 북한어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2011년 표준어로 인정받았다. 그해 여름 언중이 일상적으로 많이 써왔던 ‘입말’ 짜장면, 맨날, 복숭아뼈 등과 함께 우리말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다 해서 바른말이 됐다.

비가 오거나 끄물끄물한 날이면 부침개가 당긴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는 순간 찌뿌드드하던 몸은 가벼워지고 입맛도 살아난다. 왜일까? 소리연구가 배명진 교수는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밀가루 반죽을 넣을 때 나는 기름 튀는 소리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와 진폭이나 주파수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갓 부쳐낸 뜨끈하고 바삭한 부침개에는 막걸리가 금상첨화다. 오늘도 끄물끄물한 것이 빈대떡에 막걸리 한 사발 하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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