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테러방지법과 필리버스터, 무신불립(無信不立)을 생각하다

입력 2016-02-2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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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욱 사회경제부장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filibuster)가 연일 화제다. 더불어민주당의 김광진 의원으로부터 시작된 필리버스터는 문병호, 은수미, 박원석, 유승희 의원 등으로 이어지며 쉽사리 중단될 것 같지 않다.

이 같은 상황에 박근혜 대통령은 책상을 여러 차례 ‘쾅쾅’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또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대해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통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필리버스터는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있었고’, 우리나라보다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있었던 현상’이다.

현재 미국 대선 후보를 가리는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는 지난해 12월 10일 미국 상원에서 8시간37분간 연설을 하며 필리버스터로 유명해진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9년 8월 29일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을 막기 위해 10시간 15분 동안 발언한 전례가 있다. 물론 3선 개헌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유신체제가 등장했고 필리버스터는 1973년 우리 헌정에서 사라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없앴던 필리버스터를 부활시킨 장본인이 바로 박근혜 현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야당이 지금 국회 본회의장에서 펼치고 있는 필리버스터는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하려는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고,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실시한다’는 조항(국회법 제106조 2)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조항이 담긴 ‘국회선진화법’은 다름 아닌 박 대통령을 비롯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만든 법률이다.

이 법을 만들 당시에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있었고, 새누리당이 야당이 되었을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만든 법률에 근거한 행위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사실 현 상황에서 주목할 부분은 야당의 필리버스터와 대통령의 분통이 아니다. 테러방지법이 과연 어떤 법률인지, 법률이 만들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왜 야당이 일부 독소조항을 제거한 수정안을 제시하는지, 왜 여당은 수정안을 거부하는지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왜 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까지 동원하면서 여당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왜 테러방지법에 대해 우려를 하는가이다.

이 대목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어서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공자(孔子)의 ‘무신불립(無信不立)’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무신불립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려 있는 공자의 말씀이다.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은 사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너무나 와닿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국민들만큼 국가권력을 불신하는 나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 수립 이후 국가권력은 수많은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고문과 간첩조작 등 신뢰받을 수 없는 행태를 저질러왔던 역사가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국가권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투명해지고 민주화되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는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가정보원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건을 목격해야 했다.

지금 테러방지법이 논란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국정원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수많은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을 했던 국정원에게 지금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준다는 데 선뜻 동의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책상을 내려칠 일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부터 얻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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