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는 아름다움을 모른다

입력 2016-03-1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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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글만 쓰고 살았다. 운전면허도 없고, 운동 신경도 없으며, 담력도 없고, 뛰어난 미모를 갖추지도 못한 내게 글재주는 조물주의 공평함을 깨닫게 만드는 한 줄기 빛이었다. 긴 문학소녀 시절을 거쳐 기어박스 에디터 H가 되기까지 인생의 흐름은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본질은 한결같았다. 나는 진실과 허세, 사색과 정보를 엮어서 문장을 만들었다. 그것들이 여러분에게 조금 더 재치 있고 조금 더 섹시하게 와 닿길 바라면서.

그런데 내 밥그릇을 위협하는 소식이 들려왔더랬다. 로봇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다. 로봇은 발로 뛰지 않지만 인간 기자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모으고 취재에 나선다. 그리고 알고리즘을 통해 그 데이터를 분류하고 의미를 해석해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국내 경제지에서도 로봇이 쓴 기사를 정기적으로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까지 깊은 분석력은 없었지만 로봇이 쓴 기사는 간결하고 정확하다. 짧은 글에서도 글쟁이들을 괴롭히는 오타와 비문에서 자유로웠고, 모르긴 모르지만 내가 쓰는 것보다 몇 곱절은 빠른 속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평생 훑어보지 못할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가지고 문장을 만들었을 것은 물론이다.

편집장 J는 기회라고 말했다. 쓸데없는 글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지 않고, 사람은 진짜 글을 쓰는 시대가 온 거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언젠가 로봇이 우리의 정서와 사색까지도 흉내내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입 밖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기의 대결’이라 불리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이 있었다. 알파고는 구글의 인공지능 기술 개발 업체인 딥마인드가 만든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다. 알파고는 한국 기원에 다니진 않았지만, 딥러닝 알고리즘을 통해 스스로 바둑을 학습한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되도록 간단하게 설명해보자. 알파고는 ‘정책망’과 ‘가치망’이라는 2개의 인공신경망을 가지고 있다. 정책망은 방대한 바둑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다음번에 돌을 놓을 만한 경우의 수를 제시한다. 그다음은 가치망의 차례다. 수많은 경우의 수에서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예측치를 골라내는 역할을 맡는다. 바둑 프로 기사들이 수많은 대국을 통해 성장한다면, 알파고는 정책망에 3천만 개의 위치 정보를 입력하는 반복 훈련을 통해 예측률을 높여왔다.

나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고스트 바둑왕을 읽고 자랐다. 바둑은 세계를 축소해놓은 듯 섬세하고 미묘한 스포츠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알파고는 바둑을 두면서도 본인(?)이 바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정책망과 가치망이 데이터베이스를 걸러내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3월 9일,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이라 할 수 있는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1국의 결과가 나왔다. 이세돌 9단은 흑을 잡고 186수 만에 불계패했다. 나도 놀라고, 여러분도 놀라고, 이세돌 9단도 놀랐다. 이 결과를 두고 놀라지 않은 건 알파고 뿐일 것이다. 우리는 최고의 기술을 꿈꾸며 알파고를 만들어 놓고, 인간의 패배에 탄식을 내뱉었다. 이 씁쓸함은 명백한 아이러니고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중계방송을 보며 이세돌 9단의 표정을 보았다. 실수를 하면 표정이 굳어졌고, 패배가 확정됐을 때 즈음엔 초조함이 느껴졌다. 사람은 실수를 하고, 자책을 하며, 일어난 일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알파고에게는 한 수, 한 수가 반복되는 연산의 결과일 뿐이다. 실수도 없고 망설임도 없으며, 기복이 없는 건 물론이다.

그래. 인공지능이 바둑에서 인간 최고수를 꺾었다. 아직 대국이 네 번이나 남아있으니 패배를 단정 짓긴 이르다. 하지만 내심 인간의 직관이 아직 로봇 위에 있음을 확신하고 싶었던 우리의 자존감이 크게 흔들린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생전 처음 바둑 대국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이 시대는 간절히 기술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 두려움은 실로 합당하며 인간적인 것이다. 두려움과 아이러니는 인간의 영역이다. 로봇의 계산이 미칠 수 없는 어려운 세계다. 알파고는 승리에 기뻐하지 않지만 우리는 감동과 환희를 안다.

알고리즘이 쳐들어올 수 없는 영역을 가만히 바라보자. 대국 전날, 이세돌 9단이 기자 간담회를 통해 한 말에 깊이 공감한다. 알파고는 승리할 수 있을지언정 바둑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패배가 인간의 몫이라면, 바둑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로봇은 지치지 않고 피로를 호소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전기가 없어도 움직이며, 실패했을 때의 값은 1이 아닐지언정 0도 아니다. 이게 로봇 저널리즘의 시대앞에 선 글쟁이의 형편없는 자위라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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