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아이의 별명이 ‘책에 나오는 아이’에서 ‘교과서에 나오는 아이’로 바뀌었다. 그래서 밖에 나가면 행동에 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소설의 중간 한 부분으로 우정에 대하여 대관령의 긴 한 굽이를 돌아 걸어 내려가며 나눈 이야기가 5년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검인정 교과서라 학교마다 다를 수 있지만, 초등학교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라 전국의 모든 아이들이 5학년만 되면 그 이야기로 공부를 하는 것이다.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때 처음부터 책을 쓰기 위해 걸은 것도 아니다.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대관령 꼭대기에서부터 멀리 산 아래 할아버지 댁까지 걸어가며 함께 나눈 이야기가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가정, 그리고 모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러하지 않을까 싶어 그 이야기를 다시 한 편의 소설로 쓴 것이다. 그간 변화도 많아 20년이 지나는 사이 아이들을 반겨주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올해 여든여덟이 되셨다.
우리가 함께 걸은 대관령 옛길은 한국 오솔길의 상징과도 같은 길이다. 지금은 ‘강원도 바우길’로 불리는 그 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오가며 걸은 길이고,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을 짓고, 단원 김홍도가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경치에 반해 대관령 그림을 그린,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의 발길이 쌓이고 쌓인 아주 오래된 길이다.
그런 유서 깊은 길을 걸으면서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아버지인 나의 이야기와 또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우리가 걷는 길의 역사처럼 들려주고 싶었다. 우리가 걷는 오래된 길 이야기도 하고, 아이가 태어난 대관령 너머의 오래된 집과, 우리 삶의 거울처럼 훌륭했던 집안 선조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 아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때 아직 어린 나이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 우리가 함께 살아오면서 겪고 기억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또 거기의 어떤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며 한정 없이 먼 길을 걸었다.
아버지인 나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오면서 그 길 위에서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 또 자식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과 바람을 얘기하고 또 아들은 그동안 집에서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과 궁금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대관령 아래 할아버지 집까지 걸어 내려갔다. 또 하루 동안의 대화이지만 산 아래까지 걸어 내려왔을 때 아이가 하루 만에 부쩍 성장한 느낌을 대화 속에 느낄 수 있었다.
바야흐로 봄이다. 정말 걷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부디 바라거니 이 세상 모든 가정의 부모와 자식이 함께 길을 걸으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존경이 강물처럼 흐를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고뇌와 사랑을 이 세상의 모든 아들과 딸들이 느끼고, 또 부모에 대한 아들과 딸들의 아름답고 갸륵한 마음을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