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리CSR칼럼] 전경련의 정정당당한 모습을 기대한다

입력 2016-04-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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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권 한국SR전략연구소(코스리) 부소장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질문은 “왜 (위기가) 오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심화되는가?”이다. 진짜 위기는 위기 후의 대응에서 온다. 통상 위기가 오면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지, 위기는 실제로 위험한 것인지, 위험의 확산가능성은 어떤지 등을 분석한다. 그 후에 위기에 대한 대처의 방향이 나온다. 대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기회로 바뀌기도 하고, 되돌릴 수 없는 위험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정치스캔들에 휩싸였다. 1961년에 설립된 조직이니 그 동안 많은 격랑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을 것이다. 어버이연합에 전경련의 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이슈는 그간 겪었던 사건사고들에 비하면 그리 큰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스캔들에 대해 전경련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회공헌팀도 JTBC의 보도 이후 전경련의 홈페이지에 4월 20일에 허창수 회장이 서울경찰특공대를 방문해 특공대원들을 격려했다는 내용의 짧은 보도자료를 올린 것 외에 별다른 대응이 없다.

거대한 조직이 모든 사안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안의 경중을 따져 대응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지금 이 사안이 경제계를 대표해 경제5단체 중 하나로 꼽히는 전경련이 무대응으로 일관할 정도로 작은 사안이냐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사안을 바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첫째, 만약 이 스캔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큰 사건이다. 단순히 보수적인 단체를 후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성장에서 그 어떤 기재보다 큰 역할을 했다. 현행 헌법체계와 정치체계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결집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거리와 학교, 직장에서 헌신적으로 현재의 체제를 강력하게 주장해왔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후 집회결사의 자유는 한국사회의 약자에겐 거의 유일한 사회와의 소통 방식이었다. 그런데 알량한 돈 몇 푼으로 집회 아르바이트를 조직해 여론을 조작하려 했다. 이는 대기업을 대변하는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대기업이 저질렀던 그 어떤 갑질보다 천박한 짓이다. 시민과 국가가 우스워 보이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둘째, 만약 이 스캔들이 현재 밝혀진 바처럼 ‘사회공헌’의 외피를 두른 채 이루어졌고 특정 단체에 ‘기부금’의 형식으로 자금을 지원했다면, 지금까지 기업들이 음으로 양으로 해왔던 사회공헌이나 기부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공헌 예산은 기업이 자기 마음대로 세상에 뿌려대는 주인 없는 돈이 아니다. 이 세상엔 기업의 사회공헌 예산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지만 기업의 예산은 한정적이다. 그래서 기업에 있는 사회공헌 인력들은 한정된 예산을 최대한 잘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단 돈 300만원에 대한 지원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4시간을 운전해 기부금을 신청한 시설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기부금의 운영계획은 적절한지 직접 확인하고 오는 사회공헌팀도 있다. 외부 전문위원을 모시고 사회공헌이 제대로 잘 되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점검 받고 조언을 구하는 기업도 많다. 현장에서 기업들은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데, 기업을 대변한다는 집단에서 주먹구구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국민들이 기업의 사회공헌을 무엇이라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두 측면을 보았을 때, 이 사안은 작은 사안이 아니다. 특히 청와대의 연루설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더 그렇다. 최근 몇몇 기업 오너의 갑질 논란이 연달아 문제가 되고 있는 길목에 이 사건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무대응으로 보아 전경련은 이 사건이 조용히 잊혀지거나, 법정이나 국정조사에서 시비가 가려지길 바라는 모양이다. 이러한 대응을 한국의 경제만큼 나이를 먹은 조직이 보여줄 수 있는 관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관점의 수정을 요구하고 싶다. 이건 관록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전경련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사안의 진실을 명명백백 당당하게 밝히고, 오해가 있다면 풀고, 잘못이 있다면 사죄해야 한다. 정말 잘못이 있다면 어떻게 거듭나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치적 중립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조직운영의 투명성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기업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이 되기 위한 커다란 비전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이게 국민과 소비자에 대한 예의다.

지금까지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하며 키워왔던 기업집단이 국민을 한갓 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그 기업집단의 영혼이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는 뜻이다. 그런 기업집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그런 기업집단의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가? 55년간 한국의 기업을 대표했던 조직의 자존심과 명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고대권 한국SR전략연구소(코스리)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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