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금품수수는 인정했지만 부정한 청탁은 아니었고, 훈련비는 횡령했지만 선수를 위한 전용이었음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터져 나온 것은 박태환의 국가대표 복귀 불가론이다.
수영연맹의 비리와 박태환에 대한 결정을 함께 바라보는 우리는 혼란스럽다. 박 선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수와 꿈나무들이 수영했던 투명한 물의 원류(源流)가 수영연맹의 흙탕물이었다는 점이 그 첫째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웅을 일그러진 채로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붙이는, 수영연맹의 원류인 대한체육회를 보는 불편한 맘이 둘째다. 또한, 서로 상관없이 보였던 수영연맹의 비리와 박 선수의 올림픽 참가 불가론이 묘하게 중첩되어 그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구분지을 수 없게 만드는 난류(亂流)가 그 다음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알고 보니 중첩되어 있음을 자각한 슬픔이 그 마지막이다.
박태환 선수는 2014년 9월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국제수영연맹으로부터 자격정지 18개월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징계가 끝났음에도 ‘도핑에 연루된 선수는 3년간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대한체육회의 규정에 따라 2019년 3월까지 국가대표가 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소위 ‘이중징계’라는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조건이 따른다. 그것은 ‘원칙이 공정하고 도덕적인가’의 고민과, ‘도덕적’이란 단어가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누구의 기준에 의해 도덕적인가’를 의미하는 주관성의 극복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도덕성을 판단하고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 원칙은 태생적으로 다수의 보편 타당성을 전제로 한다. 즉, 절대 다수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합리적이고 정직한 과정’이 원칙 구성의 필요조건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원칙은 누군가의 소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도, 몇몇 사람 간의 약속도 아니다. 오히려 원칙은 ‘정의(正義)’로 해석되어야 한다.
박태환 사태는 어설픈 원칙 중심과 수영영웅 살리기가 충돌되어 생기는 논란이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의롭고 공정한 과정’이 사라진 우리 사회의 부정의가 땀 흘림의 정직함이 핵심 가치인 스포츠까지 적나라하게 투영되는 현실에 대한 애통함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
대한체육회와 그 가맹단체인 수영연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선수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징계하는 그들이 잘못했을 때는 누가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징계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들이닥친 검찰인가? 무소불위의 문체부인가? 아니면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되는 국민과 선수들인가?
우리는 그들을 봉사자로 불렀지 불공정한 원칙의 집행자로 세우지 않았다. 남의 티끌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정작 자기들의 들보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 결정을 내린 대한체육회의 스포츠공정위원회는 그들의 결정이 그 이름만큼 ‘공정’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국민 절대 다수가 동의할 만큼 정의롭고 공정한 과정에 기반을 뒀는지, 밀실행정의 결과는 아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스포츠에서 정의롭고 공정한 과정이 빠지면 남는 것은 순위와 실적뿐이다. 메달로 대변되는 결과와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이분법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가 정수인 스포츠. 우리는 과연 지금의 상황을 ‘스포츠답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