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민의 현장 JLPGA] 우승보다 아름다운 김하늘의 준우승 세리머니

입력 2016-05-04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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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28)이 아름다운 명장면을 남겼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우승보다 아름다운 준우승 세리머니로 승리지상주의에 찌든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오상민 기자 golf5@)
▲김하늘(28)이 아름다운 명장면을 남겼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우승보다 아름다운 준우승 세리머니로 승리지상주의에 찌든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오상민 기자 golf5@)

퍼터 페이스를 떠난 볼이 컵을 향해 굴렀다. 볼은 그린 위 약 1m를 저돌적으로 구른 뒤 컵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컵 속으로 사라져야할 볼이 마치 묘기를 부리듯 컵 안쪽을 맞고 왼쪽으로 튕겨 나갔다. “아~!” 그린 주위를 둘러싼 갤러리 사이에서 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웅성이기 시작했다. 컵을 핥고 지나간 볼로 인해 19홀 긴 승부가 결정 났기 때문이다. 1일 끝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사이버에이전트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총상금 7000만엔ㆍ약 7억원) 최종 3라운드 연장전 풍경이다. 골프공의 주인은 김하늘(28ㆍ하이트진로)이다.

이날 3타를 줄인 김하늘은 단독 선두를 달리다 3타를 잃은 후쿠시마 히로코(39ㆍ일본)와 극적인 동타를 이루며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김하늘의 뒷심과 인내력이 만들어낸 명승부였다. 하지만 김하늘은 연장 첫 홀에서 1m 거리 파 퍼트를 놓쳐 후쿠시마에게 우승컵을 넘겨줬다. 뜨거웠던 명승부는 그렇게 진한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을 맺었다.

김하늘의 파 퍼트에 집중됐던 스포트라이트는 후쿠지마에게 향했다. 프로 데뷔 10년만의 첫 우승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2007년 정규 투어 8개 대회를 시작으로 이 대회까지 175개 대회 만에 수확한 값진 첫 우승이었다. 그는 JLPGA 투어 통산 24승의 후쿠시마 아키코(43ㆍ일본)의 친동생이다. 그간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세월이 10년이다. 그의 우승은 한 편의 감동 드라마가 되어 일본 골프팬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후쿠시마는 우승이 확정된 순간 김하늘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의 보기 드문 실수로 인해 달성한 우승이란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김하늘은 그런 후쿠시마의 마음을 읽었던 걸까. 11살이나 많은 후쿠시마를 한참 동안 꼭 끌어안고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울먹이던 후쿠시마의 두 손을 잡고 인간미 넘치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 모습은 마치 “축하해. 울지 마. 오늘은 당신의 날이야”라며 후쿠시마를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다 잡았던 우승을 놓친 김하늘이다. 이날 파 퍼트 실수는 당분간 김하늘의 머릿속을 맴돌며 괴롭힐 수도 있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후쿠시마가 아닌 김하늘이었다. 그럼에도 김하늘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미소로 울먹이던 후쿠시마를 달랜 뒤 조용히 그린을 떠났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세리머니가 있을까.

요즘 스포츠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일 부쩍 늘었다. 상대 선수를 조롱하거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가 문제다. 상대 응원단을 자극하거나 정치ㆍ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에 반해 골프 선수는 경기 중 세리머니를 자제한다. 동반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함도 있다. 경기 중 세리머니라고 해봐야 주먹을 불끈 쥐거나 캐디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정도다. 그래서 골프에서의 세리머니는 우승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하지만 이날 생애 첫 우승을 달성한 후쿠시마는 세리머니를 할 수 없었다. 상대방의 실수(파 퍼트 실패)를 보며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하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김하늘은 그런 후쿠시마를 위해 따뜻한 포옹으로 축하를 보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함께 연출해낸 세리머니였다.

골프는 상대 선수의 멋진 플레이에 박수를 보내고 함께 기뻐하는 유일한 스포츠다. 자연에 순응하며 자기와의 싸움을 펼칠 뿐 동반 플레이어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 해도 눈앞에서 수억 원의 상금이 날아가는 걸 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김하늘은 골프의 신사도 정신을 마지막까지 우아하게 지켜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8년 포함, 올해로 투어 10년째를 맞은 김하늘은 한ㆍ일 양국에서 통산 10승을 올렸고, 두 차례의 상금왕(2011ㆍ2012년)을 지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긋지긋한 슬럼프도 극복했다. 좌절과 환희가 끝없이 반복되는 승부의 세계에서 기다리는 법과 아름답게 지는 법도 터득했다.

우승자 후쿠시마를 품은 그의 그린 위 퍼포먼스는 오래도록 회자될 명장면이다. 우승보다 아름다운 준우승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승리지상주의에 찌든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김하늘이 왜 스타플레이어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아름다운 세리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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