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대식구가 흔해 옷을 물려 입기 일쑤였습니다. 형한테 옷을 물려 입는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아들한테 물려 입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온갖 숨겨진 것들이 발견되더군요. 몸이 커져 더 이상 아들이 입지 못해 처박아 두었던 옷들이 제 차지가 되었습니다.
개성이 강한 티셔츠와 후드티였습니다. 입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도 용기 내기 어려운 옷이었습니다. 열아홉 아들 놈은 언제 저렇게 컸는지 산적 같은 덩치는 이제 왜소해진 저를 넘어선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아들의 옷 중에 먼저 빨간 후드티를 골라 입었습니다. 자로 잰 듯 딱 맞았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내에게 달려갔습니다. 왠지 눈에 익은 옷을 아내가 입고 있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스무 살 대학생 딸애가 중학교 때 입었던 교복 니트 셔츠였습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그냥 웃었습니다.
저는 6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옷을 물려 입었던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옷을 가끔 입었습니다. 교복 자유화가 시행된 중학교 2학년 시절 아버지의 점퍼를 입고 학교에 갔습니다. 어제처럼 그냥 교복을 입으면 왠지 촌스러워 보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해가 지나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옷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제 아들처럼 저도 아버지보다 덩치가 더 커져 있었습니다.
형이나 언니한테 물려 입은 옷을 두고는 불평이 있을 수 있으나 아들한테 딸한테 얻어 입는 옷에는 단 한마디의 군소리도 없었습니다. 조금은 낡은 옷이지만 그냥 이유 없이 그 옷이 좋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체온이 느껴집니다. 자신들의 옷을 입은 부모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요? 궁상맞다고는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빨간 후드티 속에 셔츠를 받쳐 입고 서울 속으로 도보 여행을 떠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