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든 여성혐오범죄든 한 여성이 영문도 모른 채 처음 본 남성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5월 17일, 그녀는 죽었고 나는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았다” “대한민국 여성인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좋아서였다”“나도 자유롭게 밤길을 걷고 싶다” …서울 강남역에 붙은 수많은 메모에서 드러나듯 여성들의 공포와 분노는 상존한다는 사실 또한 엄연하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요한 것은 왜 이 사건을 두고 여성들이 이렇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저변에 깔려 있는 공포와 분노의 본질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적확한 말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한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김 모 씨 같은 흉악한 범죄자를 등장하게 한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와 상황을 들여다봐야 한다.
“23세 여성 살해사건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 아직 대한민국에는 혐오범죄가 없다”라는 강신명 경찰청장의 단언처럼 대한민국에는 정말 여성 혐오 나아가 혐오 범죄가 없는 것일까. 인터넷과 우리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단번에 알 수 있다. 2016년 대한민국 사회는 여성혐오(misogyny)가 넘쳐난다. 여성에 대한 혐오감과 공격성을 포함하는 여성혐오는 성차별, 여성에 대한 부정,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포함한 여러 가지 양태로 드러난다.
직장에서 행해지는 여성차별부터 데이트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들의 폭력, 그리고 이번 화장실 여성 살해사건까지 이 모두가 여성 혐오와 관련이 있다. 힘 있는 사람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주변화하며 여성 차별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또한, 경쟁사회에서 밀려나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남성 중 일부는 심리적 반작용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공격행위를 드러낸다. 일상화한 이러한 여성 혐오가 이 땅의 수많은 여성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고 “여자라서 차별대상이었는데 이제는 살해 대상까지 되었다”는 절망 섞인 분노까지 분출하게 한다.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면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은 반복될 뿐이다.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가 그의 저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강조했다. “아무리 불쾌하다 하더라도 눈을 돌리면 안 되는 (여성 혐오가 만연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앎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강남 화장실 여성 살인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간단하게 치부해서는 절대 안 된다.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글들로 들끓는 일베 사이트에서부터 현실에서 상존하는 여성의 차별까지 여성 혐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악해 인식개선부터 법, 제도 수립까지 전면적인 대책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한심하기만 하다. 대중, 전문가, 미디어, 경찰을 비롯한 수사관계자들 상당수가 편을 나눠 이번 사건의 여성혐오 여부만을 놓고 소모적 논란만 이어가고 있다. 불편하지만 23세 여성이 아무 이유 없이 살해된 2016년 대한민국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여성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죽고 싶지 않아요”라는 절규가 나와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