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입력 2016-06-0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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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가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둘로 쪼개지는 위기의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대선 유세장을 누벼온 재미 여성시인 김명희 씨의 표현대로면 ‘무서운 세대’와 ‘무서워하는 세대’ 둘입니다. 둘로 나뉜 시점은 정확히 폭언과 기행의 대명사로 불려온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가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지난달,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정체 드러난 백인우월주의자’(The White Nationalists out of shadow) 제하의 기사를 통해 트럼프와 이 단체의 야합·제휴를 폭로하고 나서부터입니다.

‘무서워하는 세대’가 ‘무서운 세대’한테 느끼는 예의 공포에 관해 김 시인은 요절 시인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를 인용, 어느 정치평론가보다도 리얼한 시인 특유의 영감 넘치는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김승웅 님, 여러 유세장을 돌 때마다 번번이 ‘十三人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로 시작하던 이상의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는 ‘十三人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로 끝이 납니다만. 더욱 무서운 건 지금 미국 도처의 거리를 나도는 사람들 중에 누가 백인우월주의자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지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백인우월주의자란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툭하면 흑인을 목매달고 방화를 일삼다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의 단속으로 지하에 잠적한 쿠클럭스클랜(KKK)의 후예들이라 여기면 무방합니다. KKK가 흑인만을 노려온 것과는 달리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트럼프의 공약에 부응, 멕시칸과 무슬림을 주요 타깃으로 올리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또 한 가지, 흰 두건을 뒤집어써 신분을 감췄던 KKK와는 달리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경우 굳이 신분을 감추지는 않으나, 김 시인의 지적대로 누구도 식별할 수 없는 차림으로 군중이라는 그늘 속에 숨어왔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들이 트럼프와 야합·제휴한 시점을 골라 폭로한 타임지가 ‘정체 드러낸 백인우월주의자’라고 제목을 단 것은 그런 데 연유합니다. 지금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을 흰 두건을 벗긴 KKK에 비유한 표현이지요.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스스로를 백인우월주의자라 자칭해온 윌리엄 존슨이라는 자의 이름이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최종 확정되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할 169명의 캘리포니아 대의원 명단에 공식으로 끼어 미 국무부에 보고된 데서 비롯됐습니다.

평소 워터게이트 취재 식 수사리포트에 능한 비영리 격월간지 ‘마더 존스(Mother Jones)’의 추적 결과 존슨은 미국에 사는 흑인과 여타 유색인종들의 시민권을 당연히 박탈, 해외로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저서를 남긴 인물로, 평상시의 대선 때 같으면 미 조야(朝野)가 발칵 뒤집힐 뉴스임에도, 이번 대선 때만은 유색인종을 대놓고 비난해온 트럼프의 폭언에 가린 듯 자칫 유야무야로 그칠 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를 규명한 ‘마더 존스’가 윌리엄 존슨의 이름을 당장 삭제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트럼프 캠프 측 답변 또한 걸작이었습니다. “이런, 쯧쯧!(Oops!) 그가 대의원 명단에 낀 건 순전히 실수였소.”

‘이런, 쯧쯧!’의 맹랑한 답변을 이번에는 미 최대 부수의 신문 LA타임스가 5월 16일자 사설을 통해 맹박했기에 사설을 부분 전재합니다. 그 사설 속에 트럼프와 백인우월주의자와의 야합·제휴가 보란 듯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Oops라고? 그래, 순전히 실수였다 치자. 허나 그런 답변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의 상징 인물인 공화당 대선 후보로서는 턱도 없이 미흡한 답변이다. 존슨을 대의원으로 임명한 것이 누구였던가? 트럼프 자신 아니던가! 또 현실은 어떤가? 트럼프의 아들이 백인우월주의자의 라디오 쇼에 버젓이 출연하고, 트럼프 발언 자체가 번번이 백인우월주의자 측 주장과 슬로건으로 교직(交織)돼온 지 오래거늘, 그때마다 Oops로 일관할 건가? 또 하나, 트럼프는 KKK 리더 데이빗 듀크로부터 모종의 보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 왜 그토록 더딘가? (중략) 트럼프는 차제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 백인우월주의자의 지원이나 선전을 결코 원치 않는다는 것, 또 증오나 인종차별이 미 국내에 더 이상 발붙일 데가 없다는 걸 선언해야 한다. 자, 이를 확약할 건가 말 건가? 만약 하지 않겠다면 캘리포니아 공화당원들은 스스로 자문할 것이다. ‘저 사내…공화당 대선 후보 맞아?’”

오늘부로 첫선을 보이는 이투데이의 새 칼럼 ‘세계는 지금’에 굳이 ‘백인우월주의자’를 첫 소재로 올린 데 대한 해명도 병기(倂記)함이 순리일 성싶습니다. 백인우월주의가 한갓 미 국내 뉴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지구 도처에서 발호, 세계를 고민에 빠트리는 국제적 난제 중의 난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자와 흑인, 동양인, 유색인종의 축출을 구호로 툭하면 나치 깃발을 휘둘러온 독일의 스킨헤드(Skin Head)를 필두로 러시아,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파라과이, 남아공 등 백인이 주종을 이룬 나라에서 ‘백인만을 위한 국가 수립’을 열렬히 부르짖어온 무리들의 기승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놀라운 건 이들 모두가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쳐온 마르크시스트들에 뒤지지 않을 국제적 동맹관계로 묶여 있어 반년 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세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백악관은 말 그대로 냉전시절의 크렘린이 될 것이 자명합니다.

끝으로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자들한테 그토록 어필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엊그제 애틀랜틱지가 보도한 ‘도널드 트럼프의 심리’(The Mind of Donald Trump) 제하의 기사는 사회심리학자 제스 그래엄의 말을 인용, 매우 유력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인간이 상고시대부터 지녀온 전염병에 대한 공포, 즉 외인을 기생충이나 독물 또는 어떤 불순물로 여겨 무서워하는 공포에 호소하고 있다. 이런 나르시즘적 호소에 평소 자신의 삶을 침해당했다 여겨온 다수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경도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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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외교학과 졸.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일보 워싱턴특파원, 시사저널 워싱턴특파원 역임. 저서: ‘파리의 새벽, 그 화려한 떨림’,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DJ를 평양에 특사로 보내시오’, ‘실록 김포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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