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쪽으로 해마다 여성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어떤 주제인지, 어떤 영화들이 상영되는지, 올해의 토론 주제는 뭔지 주목해 왔다. 영화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을 말하는 여성이 만든 영화들이 상영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사심(私心)도 충만했다. 기자가 학부 시절 인상깊게 수강했던‘연극영화론’ 강의를 하셨던 선생님이 핵심 인물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참 졸린 오후 시간 강의였다. 여름이 되어갈 수록 점점 더워지던 강의실에서 브라운관 작은 화면으로 ‘전함 포템킨’이나 ‘400번의 구타’‘시민 케인’ 같은 흑백영화를 정말 눈도 안 떼고 지켜보고 해설하는 열강에도 귀를 기울여 듣던 수업이었다. 학기말 숙제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리포트를 쓰는 것이었다. 성심성의껏 시험 답안을 써내려가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이화여대 재학시절 문리대 연극부에서 활동했고 독일 유학 이후 1992년 사단법인 여성문화예술기획(여문)이란 단체를 만들어 대학로에서 여성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연극을 올리는데 주력했던 분. 내게 그토록 감명깊은 강의를 해주신 이혜경 선생님이 바로 여성영화제 17회까지 내리 집행위원장을 하신 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가 브레히트를 공부하기도 했고‘고도를 기다리며’를 참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숙제를 내줬을 수는 있긴 한데. 아니, 그런데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없는데요?”
올해 비로소 명예 집행위원장이 되어 뒤로 살짝 물러나신 이혜경 위원장께선 만나자마자 반가워하는 기자에게 도리질을 하셨다.“연극평론을 하는 이혜경이란 분이 또 있어요. 아마 그 분이었을 거에요. 아무려면 어때요, 이렇게 오랫동안 여성영화제를 응원해 왔다는 것만으로 됐지.”라 하신다.
한 편으로는 착각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아무려면 어떠냔 생각이 들었다. 여성과 문화를 열과 성을 다해 연결하는데 힘쓰신 ‘이혜경’이 두 분이나 계시다니 좋은 일 아닌가.
“벌써 18회, 이제 여성영화제도 성장통과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청년의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내부 조직도 이제 결정 하나 내리기 쉽지 않을 만큼 커졌죠. 그동안 힘들었죠. 하지만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그 시간동안 많이 바뀌었어요. 거대한 체제 같은 것들을 만드는 걸 남성이 주도했기 때문에 여성은 주변부에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체제의 디테일은 여성들이, 여성들의 문화가 많이 만들어 왔어요. 경제력을 갖추면서 여성은 많이 바뀌었죠. 그렇지만 남성들은 여전히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려 하고 지배했던 과거의 질서를 유지하려고만 하니‘여혐’ 같은 사회 현상이 나타나는 거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때라 더 남녀의 대립 구도가 더 두드러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봐요. 국가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일하러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밉고 해를 가하는 제노포비아가 나타나잖아요. 남성이 변해야 할 때인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박하게 대립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더욱 사회를 성찰하게, 성숙하게 하는 데 있어 문화는 중요하고, 그것의 한 주체가 여성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게 이 위원장의 생각이다.
“사회적 관계 형성에는 다면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성들도 깨져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여성들이 갖고 있는 공포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입장을 바꿔서 생각도 해 봐야 합니다.”이 위원장은 이 때문에 오히려 정치 세력으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전개돼 온 여성영화제의 역할이 돋보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사실 영화제를 만들 돈 만들기조차 어려웠다. 첫 해 2억원을 정말 여러 사람에게서 모아 시작했던 영화제는 외환위기 이후 “올해는 접자.”고 집행위원들이 뜻을 모아 이 위원장을 찾아올 만큼 사정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스트레스로 팔까지 마비됐던 이 위원장만은 안 된다며 밀어붙였다. 여성문화예술이 지속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선 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영화가 마땅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여성들이 모이는 장(場)으로서의 영화제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다행히 이후 영화 등 지식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아는 정부가 이어지면서 여성영화제도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여문 회원이었던 변재란, 김소영, 유지나 같은 분들이 여전히 여성영화제에 자문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GS칼텍스 등은 꾸준히 여성영화제를 지원하면서 영화제는 13억원원 규모, 세계 최대 여성 영화제로 도약했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개막식에 이어 피아니스트 강현주의 연주와 함께 흑백 무성영화가 상영되었다. 세계 최초의 극영화 감독인 알리스 기-블라쉐의 영화들이었다.‘양배추 요정’‘페미니즘의 결과’등은 1890년대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중심적 영화사 연구 속에서 묻혀진 이름 알리스 기-블라쉐는 고몽영화사에서 비서로 일하다가 영화 제작에 나서고, 큰 인기를 얻자 영화사에서 총괄 제작자로 임명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영화깨나 안다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존재. 특히 ‘페미니즘의 결과’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가상세계를 그리며 사회의 성적 불평등을 정면 비판했다. 잠깐 존재했다 없어진 여성영화제들이 많지만 오랜 역사를 지속해 온 끄레테이유 여성영화제 제키 뷔에 집행위원장과 영화학자 주느비에브 셀리에 교수가 패널로 참석해 프랑스 영화사 120년을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매해 지역 특별전이 열리지만 올해는 최초의 극영화 감독이 여성임을 알린 것이 더 의미있었다.
이 위원장은“해마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다뤄온 것도 여성영화제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올해는‘일본군위안부, 기억의 극장’을 쟁점으로 삼았다. 화제작‘귀향’뿐 아니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총 6편이 상영됐다. 특히 독일에서 제작된 다큐는‘잊혀진 필리핀 위안부’. 9인의 위안부가 자신의 생이 다하기 전에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을 따라가는 작품이었고 올해 영화제의 캐치프레이즈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에도 잘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이 위원장은 영화제가 축제와 토론의 장으로서뿐 아니라 시장의 기능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여성영화가 단편, 독립영화로만 끝나지 않고 극장에 걸리는 상업영화로 제작돼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피치앤캐치’‘아시아단편 경선’, 10대 여성들이 만든 영화가 출품돼 경쟁하는 ‘아이틴즈 대상’등이 그 다양한 장치들이다.
이 위원장은 여성영화제 첫 회부터 아시아 네트워크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고 아직도 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도 여성 영화제는 금세 명멸하기 일쑤. 세계 여성영화제 네트워크에 모이는 각국 대표와 영화제가 10개 정도밖에 안된다며 아쉬워한다. 한 10년 전쯤 크게 앓은 이후 힘이 들어도 손을 놓지 않았던 이 위원장은 그래도 올해는 명예 집행위원장이 되어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이 위원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김선아 집행위원장은 개막식에서 지난 7년간 여성이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되어 제작, 극장에 걸린 상업영화는 12편에 불과하다고 했다.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뚜벅뚜벅 가면 된다. 여성영화제가 각종 여성문화를 아우르는 미디어 플랫폼으로서의 역할까지도 하겠다는 바람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지리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