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S] '3년간 검토하더니'..중국·방글라데시 따라간 피임약 분류

입력 2016-06-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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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약처, 현행 유지 결정.."과학적 판단 배제한 이해당사자 눈치보기" 비판

보건당국이 지난 3년간 진행된 연구 결과를 토대로 피임약 분류체계를 종전대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론 내린데 대해 사회적 혼란 발생을 우려해 재분류를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본 분류 그대로 사전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긴급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각각 분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의사, 약사 등 이해 당사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미국, 일본 등 대다수 선진국의 사례와 배치되는 결정을 내렸다는 지적이다.

◇식약처, 3년간 진행한 연구용역 토대로 "피임약 분류는 그대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달 20일 피임제 사용실태, 부작용, 인식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피임약 분류를 현행대로 유지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성관계 전에 복용하는 사전피임약은 약국 구매가 가능한 일반약으로 분류하고, 준비되지 않은 성관계 후 원하지 않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긴급하게 복용하는 긴급피임약은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약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은 지난 2012년 식약처의 ‘피임약 재분류 번복’ 논란 이후 4년만의 후속조치다.

식약처는 2012년 6월 '레보노르게스트렐' 성분의 긴급피임약을 전문약에서 일반약으로, '에티닐에스트라디올' 성분을 포함한 사전피임약을 일반약에서 전문약으로 분류체계를 전환키로 결정했다.

사전피임약은 장기간 사용되기 때문에 심혈관 부작용 등 의사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사후피임약은 한번만 사용하고 안전성에 큰 위해가 없다는 논리에 의거한 결정이다.

당시 식약처는 "과학기술발전 등 보건의료환경 변화에 대응해 국민들이 의약품을 안전하고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의약품 재분류 세부기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과학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보건당국은 전문가, 시민단체 등의 논의 결과를 근거로 당초 추진키로 한 피임약 재분류안을 백지화했다. 그동안의 사용관행, 사회·문화적 여건 등을 고려해 현 분류체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만 사용실태 및 부작용에 대한 모니터링 결과를 토대로 재검토 될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식약처는 이후 피임약 재분류를 다시 논의한 결과 현행 분류체계를 유지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번 결정은 식약처 의뢰로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이 지난 2013년부터 3년간 실시한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연구’를 토대로 결정됐다.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은 지난 2012년 설립된 식약처 산하기관이다. 연구 용역에는 4억원이 투입됐다.

이 연구는 “안전성 측면에서 분류를 전환할만한 새로운 정보가 보고되지 않았고, 사회적 문제 우려 또한 지속되고 있어 현 단계에서는 현행분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결론내렸다.

사전피임약의 경우 안전성 평가, 사회문화적 여건·사용실태 등에 검토한 결과 2,3세대는 일반의약품, 4세대는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는 현행 분류체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긴급피임약 역시 같은 이유를 들어 현행대로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는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이다.

◇식약처, 선진국보다는 저소득국가 선호하는 분류체계 선택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이 진행한 연구 결과와 식약처의 결론을 종합해보면 이번 피임약 분류체계 결정은 사회적 혼선을 최소화하는데 무게중심을 둔 것으로 분석된다.

식약처가 제시한 과학적 판단을 살펴보면, 사전피임약은 혈전·색전증 등 중대한 부작용 보고가 3년 동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됐다. 크게 위험한 약이 아니기 때문에 약국에서 판매해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긴급피임약은 부작용 발현 양상이나 중대한 부작용이 증가하지 않았지만 1개월내 재처방률이 3%에 달해 반복사용 및 오남용에 따른 안전성 우려는 지속돼 의사 처방이 필요하다고 식약처는 판단했다.

업계에서는 부작용 보고 건수 증감률을 피임약 분류체계 유지의 결정적 근거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제기한다.

지난 2012년 식약처는 피임약 분류 체계 전환의 근거로 “사전피임약은 장기간 복용으로 인해 여성호르몬 수치에 영향을 미치고 혈전증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고 긴급피임약은 긴급한 상황에서 1회에 한해 복용하기 되기 때문에 혈전증 등 부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식약처의 한 관계자는 당시 공청회에서 “현행처럼 사전피임약이 일반약으로 분류됐던 것은 과거 산아제한 정책에 따른 조치였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사전피임약의 중대한 부작용 보고가 줄었다는 이유로 4년 전 제시한 과학적 판단이 뒤집어진 것이다.

식약처가 제시한 혈전·색전증 등 중대한 부작용 보고 건수도 지난 3년간 총 69건에 불과해 통계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연구보고서에서도 “국내의 경우 피임제 복용 이후 정맥혈전증 발생의 몇몇 환자사례 보고 정도가 문헌으로 보고되고 있고 자발적 부작용 보고건수도 미미해 안전성을 고려한 정책결정의 근거자료가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식약처의 이번 결정이 선진국들의 정책 방향과 배치된다는 점도 논란을 증폭시키는 배경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해외에서 피임약의 분류는 다양하게 적용된다”고 말했다.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연구’에서도 한 연구를 인용해 147개 국 중 법적으로 처방전 없이 사전피임약을 구매할 수 있는 나라는 35개국(23.8%), 처방을 받아야만 사전피임약을 구매할 수 있는 국가는 45개국(30.6%)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주요 국가별 사용실태를 보면 우리나라처럼 처방전 없이 사전피임약을 구매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수단, 이집트 등 의약품 제도 관련 선진국과 거리가 먼 국가들이다. 반대로 처방전이 있어야만 사전피임약을 구매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이 대거 포함됐다.

▲세계 경구피임약 처방 및 심사 요구사항(자료: 피임제 사용실테 조사·연구)
▲세계 경구피임약 처방 및 심사 요구사항(자료: 피임제 사용실테 조사·연구)

'노레보'가 대표 제품인 '레보느르게스트렐' 성분의 긴급피임약의 경우 우리나라는 모든 용량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됐지만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에서는 일부 고용량 제품을 제외하고 대부분 일반의약품으로 지정됐다.

▲국가별 긴급피임약 '노레보' 분류 현황(자료: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연구)
▲국가별 긴급피임약 '노레보' 분류 현황(자료: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연구)

연구에서도 “처방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102개 국가 중에서 90개 국가는 저소득, 중간 소득층 국가”라고 밝혔다. 식약처는 4년 전 “사전피임약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캐나다 등 의약선진외국 8개국에서 모두 전문약으로 분류됐다”고 전문약 전환을 공표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방글라데시 등의 정책을 따라간 셈이 됐다.

◇업계 "의ㆍ약사, 종교계 등 반발 의식한 결정" 비판

식약처의 피임약 분류 전환 포기는 의·약사, 종교계 등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인상이 짙다.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ㆍ연구'에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관련 단체간 인식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의사는 사전피임약(69%)와 긴급피임약(92%) 모두 전문약으로 분류해야한다는 압도적인 지지를 내놨다. 반대로 약사들은 사전피임약과 긴급피임약 모두 각각 95.5%, 68% 지지로 일반약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의사와 약사가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은 모양새다.

▲전문가별 사전피임약 분류체계 설문조사 결과(왼쪽: 의사, 오른쪽: 약사, 자료: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 ·연구)
▲전문가별 사전피임약 분류체계 설문조사 결과(왼쪽: 의사, 오른쪽: 약사, 자료: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 ·연구)

가급적 많은 의약품을 처방 영역에 두려는 의사와 약국 구매용 일반약이 많을수록 매출 증대에 유리한 약사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보건당국이 2012년 피임약 분류 전환을 추진할 당시에도 의사와 약사단체들의 반대가 거셌다. 여기에 종교단체는 "긴급피임약은 단순 피임약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배아를 죽이는 화학적 낙태약이다"며 거세게 반대했다.

피임약 재분류가 추진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과학적 판단 이외에도 구매 접근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성관계 이후 일정 기간내에 복용해야 하는 긴급피임약은 병원보다는 접근성이 높은 약국에서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로 이 연구에서 성인여성 3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 긴급피임약도 일반약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50%로 반대 의견과 유사하게 나타났다. 사전피임약은 일반약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70%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선진국 사례와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피임약 분류 체계를 합리화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세우고도 결과적으로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을 우려해 현행 체계를 유지하는 어정쩡한 결론을 도출했다"고 비판했다.

'피임제 사용실태 조사·연구'는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 연구원 이외에도 의대교수4명, 약대교수 4명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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