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 결정으로 시장에서는 2008년 9월 15일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과연 리먼 사태가 재연될까.
지난 23일(현지시간)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EU 탈퇴가 결정됐다. 당시 시장이 열려있던 도쿄증시에서는 닛케이225지수가 1000포인트 이상 하락했고, 안전 자산인 엔화값은 달러당 99엔대까지 치솟는 등 아시아 금융시장은 패닉이었다. 24일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도 리스크 회피 심리가 강해지며서 뉴욕증시에서 다우지수가 600포인트 넘게 빠지고,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맥없이 추락했다. 다만 런던증시는 파운드화 약세 수혜주인 수출주에 매수세가 유입되면서 급락세는 면했다. 같은 날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는 시장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유동성 공급을 위한 수단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사전에 준비한 공동 성명을 신속하게 발표했다.
대부분의 시장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2008년 9월 15일 미국 리먼 브러더스 파산 당시의 악몽을 떠올렸다. 대형 금융기관이 파산하면서 금융시장은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이를 ‘리먼 쇼크’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대형 금융기관의 파산이 미칠 충격을 우려해 이튿날인 9월 16일 대형 보험사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AIG)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긴급 경제 안정화 법안이 9월 29일 하원에서 부결돼 이것이 다시 금융 시장에 큰 충격을 줬고, 이 여파로 29일 다우지수는 777달러 하락하며 사상 최대의 낙폭을 기록했다.
사실 이번 영국 국민투표 결과가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건 아니다. 다만 사전 여론조사에서 잔류파가 우세했으나 결과가 탈퇴로 나오면서 시장에서 혼란이 유난히 커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EU라는 공동체의 붕괴 조짐에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급격한 리스크 회피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리먼 파산이 브렉시트와 다른 건 금융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대형 금융기관의 부실이 금융 시스템 자체의 위기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당시 파생상품 시장이 발달하지 않아 미국 영국 일본 같은 금융 선진국에 비하면 영향은 새발의 피였다.
전문가들은 브렉시트로 런던에 본사를 둔 금융기관 등에 어떠한 영향이 나오든 금융 시스템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의장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28일 브루킹스연구소 블로그를 통해 “브렉시트 때문에 현 시점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꽤 낮다”고 밝혔다. 각국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의 재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고,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점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버냉키 전 의장은 “브렉시트에 따른 최대 피해자는 영국 자신이며 영국 경제가 향후 적지 않은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브렉시트가 세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이 역시 기우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예를 들어 지난 24일 영국 증시는 파운드화 가치 하락으로 되레 수출 기업의 반사익 기대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낙폭도 크지 않았다. 또한 영국의 국가 신인도가 크게 떨어져 영국 국채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지난 27일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영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상위인 ‘AAA’에서 ‘AA’로 두 단계 낮췄다. 하지만 영국 증시는 28일 2.6%나 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번 브렉시트 사태는 과거와 달리 경제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정치 측면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아시가 국가의 통화 가치, 리먼 사태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 등 경제의 어딘가에서 불거진 문제였다면 브렉시트는 시민들의 불만이 정치를 움직여 경제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트럼프 돌풍도 같은 이치다.
한 유럽 경제 전문가는 “이번에 사람들은 EU 탈퇴 자체를 추구했다기보다는 단순히 현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이민자가 늘어나고, 임금은 오르지 않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다 긴축 재정 탓에 대학 등록금도 오르는 등 다양한 일상의 불만이 폭발했다. 생활 수준이 나아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선진국의 저성장이어서 해결이 어렵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와 금융 시장이 좌지우지되는 정치의 시대가 계속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