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진 세계경제연구원 원장은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얘길 나눠보면 자주 쓰는 말이 “어렵지 않았어요”다. “안 바빠요” “힘들지 않아요”란 말도 습관적으로 한다. 그리고 잘 웃는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도리가 없지만 이런 공력은 대체 어떻게 쌓여온 건지 궁금증이 더 커진다.
“차 타고 오셨을텐데 길이 좀 막혔나 봐요?”라고 묻자 “아니에요, 지하철로 왔어요. 저 차 없앤 지 몇 년 됐어요”라고 한다. ‘차=기동력’ 혹은 ‘차=명성’이란 공식에 가위표가 쳐 진다.
“그렇게 다니면 힘들지 않으세요, 일정도 많으신데?”
“아니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걷고나서부터 건강 관리도 자연스럽게 되는 걸요. 집 현관 앞에서 사무실에 딱 도착할 때까지 1시간 20분 쯤 걸리는데 지하철, 버스 다 이용해서 와야해요. 눈이나 비가 와도 걸어서 와요. 팔에 샤오미 미밴드도 차고 다니는 걸요. 만보씩 걷는 여자에요, 제가”
물론 비화(秘話)가 있다. 뭐든 했다 하면 열심히 하는 송경진 원장답게도 건강에 적신호가 온다는 생각이 들자 헬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한 것이 문제였다. 족저근막염이 찾아온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출퇴근 시간이라도 걷자고 생각해 차를 팔고 운동화를 신었다. 안 팔고 갖고 있어도 되잖았느냐고 묻자 마치 자신의 차를 ‘김유신의 말’처럼 여겼는지 “차를 갖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또 운전을 할까봐서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70대 후반 나이에도 매일 새로운 지식 습득과 공부에 여념이 없는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과 함께 오래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에요, 저 완벽하지 않아요. 그냥 열심히 할 뿐이죠”라고 하지만 그건 겸손이란 걸 안다.
미국 유학 이후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에서 일하며 국제 무대에서 일하는 것을 제대로 익힌 그다. 30대 초반 나이에 최연소 국장을 달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성별을 떠나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렇지 않으면 칼같이 지적하는 스타일이었다. 대충대충 넘기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곳도 관료적 조직이어서 뒷말이나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저는 사무총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어요. 운이 좋았죠. 여성이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서 일을 잘 하게 하려면 리더십 서포트(leadership support)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어주고 지원해주지 않으면 남성들 틈에서 커 나가기 정말 어렵거든요”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일하면 일할 수록 자신감이 떨어지는 면도 있었다.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 대한 인지도도 낮고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할 때였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 얻은 결과는 목소리 크고 영향력 있는 나라들을 위한 것이 되는게 안타까웠다. 그런 생각을 갖고 싱가포르 ITUC 아태 본부에서 일할 때였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창을 열었는데 마침 재정경제부에서 외신 대변인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고국에 힘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바로 지원서를 작성했다. 한글 프로그램이 깔려있지 않은데 어찌어찌 구하고 밤새 써서 지원했다. 합격이었다.
관료 사회에선 민간 전문가들을 기용해 경쟁력을 강화하자고 하면서도 은근히 고시 출신과 비교하거나 ‘굴러온 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아 결국은 민간에서 온 전문가들이 떠나는 일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역시 답은 “별로 힘든 걸 몰랐다”였다.
“그건 제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에서부터 한덕수 전 부총리, 권오규 전 부총리까지 수장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을 많이 해서였을 수도 있고 새로운 일을 재밌어 하는 도전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재경부에서 일하는 와중에 사공일 전 장관(당시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겸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과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보스 포럼에 대통령 특사로 떠나야 하는 사공 전 장관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촉박하게 일을 맡았던지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자료를 만들어야했다. 송 원장은 그 일도 웃으며 “어렵지 않았다. 재밌었다”고 했다.
그의 완벽한 일처리에 주목한 사공 전 장관은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송 원장을 곁으로 불렀다. 사공 전 장관을 근거리에서 밀착 수행하면서 준비에서부터 모든 과정을 지켜본 그에게 역사적인 기록 ‘백서’를 만드는 팀장 역할도 맡겨졌다. 누구를 만난 날짜는 물론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걸 보면. 그리고 최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는 사공 전 장관과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에서 열리는 ‘이코노미스트 서클(Le Circle des Economistes)’에 다녀와서 들은 걸 묻자 얼른 일어나 달려가 수첩을 가져왔다. 원장이 이렇게 직접 강의를 듣고 메모한다. 빼곡한 것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도 이 회의의 장단점을 다 파악해 왔다. 얘기를 듣다보면 늘 모자라다. G20 정상회의 얘기는 만나서 듣고 또 들어도 새로운 얘기가 나온다.
“G20 정상회의 자체가 저에게나 한국에나 도전 과제였죠. 세계를 움직이는 정상,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는 최측근 핵심인사들과 일해 본 경험은 정말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는 더 많이 공부해서 더 전략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도 다시금 깨달았던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원래부터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을까. 그는 웃으며 살짝 손사레를 쳤다. 송 원장은 “다만 남들이 뭐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걸 관철시키는, 이른바 4차원적인 면은 있었다”고 했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학교에 들어갔고 지금은 저리도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것이 훌륭한데 알파벳조차 깨우치지 않고 중학교에 들어간 그였지만 “어려서부터 뭔가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중1 때부터 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독대하며 얘기하는 꿈을 꿨어요. 알파벳도 모르고 들어간 주제에 말이죠. 그런데 어느 사이 영어 실력이 급격하게 늘었어요. 제가 워낙 TV 보는 걸 좋아해서 한국 방송이 안 나오는 시간에 무조건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현 AFN)을 켜놓고 봤고 팝송이 좋아서 가사를 들으며 써보고 외우고 했던 게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왜 영어 선생님과 AFKN에서 미국인들이 하는 발음은 다를까 생각하며 따라도 해보구요. 그리고 일찌감치 영어를 전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중2 때인가 우리 반에 항공사 기장 딸이 외국에서 전학을 왔어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아주 드물었던 때였고 그래서 영어 선생님께서 걔가 누군가 찾으려고 하셨는데 저희 반에 오셔서는 ‘그게 너지?’라고 하신 거에요. 영어 실력으로만 찾아보신 거죠. 전 무조건 영어다, 그래서 외국어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부했는데 더 좋은 대학에 원서를 써야 한다며 담임 선생님은 끝까지 반대하셨죠. 원서 접수 한 시간을 남겨두고서야 제가 사온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셨어요. 부랴부랴 가는 제게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구요. ‘너, 이렇게 인생 살면 뭘 해도 성공한다’구요. 낙천적이라기보단 4차원이었죠?(웃음)”
4차원이라는게 현실을 모른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는 현실과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승패가 갈린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청년들, 젊은 여성들에게 잘 될 거다, 용기를 가져라, 라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파악을 제대로 하도록 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비로소 끈기가 생깁니다. 그 어느 것도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없더라구요. 그리고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여성들에겐 경제 공부를 꼭 권합니다. 젠더의 문제도 결국 경제를 알아야 풀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