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 풍경] 내 기억 속의 아름다운 선물들

입력 2016-08-0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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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언제나 과한 선물이 문제다. 말은 선물이라지만 선물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도 많다. 김영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농민 핑계를 대고 음식점 핑계를 대지만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기득권을 놓기 싫어서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값비싼 선물을 받고 값비싼 선물을 주어야만 고마움이 표시되는 건 아니다. 어린 시절 크고 우뚝하게 보였던 분은 나중에 어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크고 우뚝하게 보인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이 그렇고, 또 할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삶이 늘 커다란 산처럼 여겨진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할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 존경하고 또 고마워했다.

산과 들의 모든 나무의 나뭇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는 늦가을, 노새가 끄는 작은 수레가 우리 집으로 온다. 빈 수레를 끌고 온 사람은 나이 쉰쯤 되어 보이는, 한지를 만드는 종이 공장의 종이 아저씨다. 종이 아저씨는 우리 집 닥나무 숲으로 가 닥을 베어 수레에 싣는다.

한 달 반쯤 지나 이제 그 일을 잊을 만하면 어느 날 다시 우리 집에 온다. 이때엔 종이 아저씨가 두루마리로 둘둘 만 창호지 뭉치를 어깨에 메고 온다. 우리 집의 닥나무를 베어 간 다음 그걸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그중 일부를 다시 우리 집에 가져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닥나무 숲이 저절로 생긴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냥 생긴 숲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이 산 저 산에 퍼져 있는 닥나무를 한곳으로 파 옮겨 닥나무 숲을 만들었던 것이다. 집에서 종이를 직접 만들 수 없으니 그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심어 그걸로 자급자족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종이 아저씨가 창호지 뭉치를 가져오면 할아버지가 이웃집들과 가까운 친척집 한 집 한 집을 떠올리며, 또 그 집에 문이 대략 몇 개인지 어림 계산을 하며 창호지 뭉치를 나누신다. 겨울이 되었는데 새로 문을 바르라는 뜻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이웃집에 종이를 나누고 또 가까운 대소가에 종이를 나누었다. 그 심부름을 우리가 신문배달원처럼 옆구리에 창호지를 끼고 다니며 했다.

그러면 며칠 후 종이를 보낸 것에 대한 답례품이 왔다. 꼭 종이를 보낸 것에 대한 답례품이라기보다 한동네에 살며 이런저런 보살핌을 받은 것에 대해 잘 다듬어 손질한 오죽 담뱃대를 보내오기도 하고, 지난 가을에 잡은 토끼의 털로 만든 토시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잘 고은 수수엿을 보내오기도 하고, 형편이 어려운 집 같으면 표면에 살얼음이 살짝 낀 연시를 보내오기도 했다.

누구나 마음 안에 고마운 분들이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아주 큰 도움을 받은 분이 있기도 하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도움을 받은 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 오히려 큰 선물을 하면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나, 실례가 될 때가 많다.

내가 최근 김영란법 논란의 와중에 어린 날 할아버지와 이웃들이 주고받았던 선물을 다시 떠올리는 건 그분들이 서로 고마움의 표시로, 또 그런 정성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일에서도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오래 기억할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도 우리가 받은 고마움만큼이나 아름답게 하자.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에게 김영란법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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