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권호의 역학경영] 태조 왕건의 유훈 ‘훈요십조’의 진실

입력 2016-08-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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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의 역사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재 중 하나가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遺訓)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이다. 훈요십조 중에서도 망국적 지역감정의 단초가 된 제8조의 내용이 더욱 그러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훈요십조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풍수 이치 면에서 모두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가짜임에 틀림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훈요십조 제8조는 ‘차령산맥 남쪽과 공주강 바깥의 산과 지세가 역모의 기상을 품고 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구체적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산 모양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ㆍ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ㆍ국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다.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나 궁원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 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훈요십조가 가짜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 고려의 건국과 태조 왕건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신라의 도선국사는 금강 이남인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왕건에게 생명의 은인인 신숭겸도 금강 이남인 전남 곡성에서 출생했는데, 왕건이 이들을 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둘째, 고려 8대 왕 현종에 이르러서야 훈요십조가 공식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1대 태조 왕건, 2대 혜종, 3대 정종, 4대 광종, 5대 경종, 6대 성종, 7대 목종까지는 존재 자체가 없다가 현종 때 갑자기 등장했다는 점이 왕건의 유훈일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린다.

셋째, 풍수 이치 면에서도 타당성이 없다는 점이다.

훈요십조는 고려 현종 1년 거란의 2차 침입(1010년)으로 당시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개경에 보관돼 있던 고려실록이 화재로 소실되어 실록을 재편찬할 때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며 가져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이 943년 4월 박술희(朴述希)를 내전(內殿)으로 불러 전해준 것으로 되어 있다. 태조 왕건은 장화왕후의 소생인 무(武:혜종)를 정윤(태자)으로 삼고자 하면서 박술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는 후백제 호족 출신으로 막강한 세력을 보유했던 박술희를 혜종의 후견인으로 삼으면 후계자의 세력 기반이 확고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2대 왕 혜종의 세력 기반인 외가가 전라도 나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주강 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의 내용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현종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거란에 항복하는 대신 장기전을 펴서 거란군을 지치게 하자는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금의 전라도 나주로 피란을 갔다. 만약 현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훈요십조라는 것이 있어서 지금의 공주 이남 지역을 불신했다면 결코 나주로 피란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 왕건이 지금의 공주 이남 지역을 배척할 리 없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그중 하나가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이야기다. 고려의 개국 공신인 그는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하자 왕건이 탈출할 수 있도록 왕건의 갑옷을 대신 입고 장렬히 전사한 인물이다. 신숭겸의 출생지도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이다.

신숭겸은 사후 태조 왕건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고, 곡성 양덕사(陽德祠), 대구 표충사(表忠祠), 춘천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서 제향을 지냈다.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나주로 피란을 갔다 오면서 나주 현지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았다. 현종이 개경으로 귀환하고 피란 중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을 다수 중용하는 상황이 조성되자,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진 세력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태조 왕건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가짜 훈요십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내용을 담고 있는 ‘고려사(권2)’. 왕건이 박술희를 내전으로 불러 전해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내용을 담고 있는 ‘고려사(권2)’. 왕건이 박술희를 내전으로 불러 전해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까지 시대적 배경이라는 관점에서 훈요십조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풍수 이치 면에서도 훈요십조 제8조는 터무니없는 억지이다.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고 했는데 산형의 배반이라면 사신사(四神砂), 즉 좌청룡 우백호 후현무 전주작의 전체 혹은 일부가 혈판(穴坂)을 보기 좋게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감싸지 않거나 감싸는 듯하다 밖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사신사는 특정 지점에서 배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원문 그대로 공주 이남의 산지(山地) 전체에서 사신사가 배반해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수 없었다면,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고 고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공주 이남 지역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지세가 배역했다는 말은 풍수에 무지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풍수에서는 물이 최대한 늦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를 길(吉)하게 본다. 따라서 산맥과 물의 흐름이 동일한 구조[山水同去]보다 산맥과 물의 흐름이 정반대가 되는 역수(逆水) 구조가 좋은 것이다.

음택이든 양택이든 역수가 이뤄질수록 큰 부자와 정치인, 우수한 인재가 다수 배출될 수 있는 길지(吉地)이다. 따라서 지세가 배역했으니 그곳에서 배출되는 인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은 ‘배반할 배(背)’자와 ‘거스릴 역(逆)’자가 풍기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자극하는 선동적인 주장이다.

태조 이성계가 수도로 정한 뒤 60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이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글로벌 대도시이자 대한민국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배경을 풍수지리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 지역이 역수 길지(吉地)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으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구조다. 따라서 대부분의 물길은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모습을 취한다. 이 같은 지세에서 부분적으로 남쪽 지형이 높아 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거나, 혹은 서쪽 지형이 높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모습을 보이면, 소위 ‘물이 거꾸로 흐르는 역수 길지’가 되는 것이다.

청계천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백운동 계곡(서쪽)에서 발원해 한반도의 통치 권력을 상징하는 경복궁과 청와대를 감싸고 동쪽인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서울은 풍수적으로 대(大)정치가, 재벌, 우수 인재들이 다수 배출될 수 있는 역수 길지에 해당된다.

결국 훈요십조 제8조는 엉터리 풍수지식을 동원해 공주 이남 출신 인재들을 견제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동기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치졸한 문장으로, 훈요십조 전체가 가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왕건의 유훈이라 알려져 왔던 훈요십조가 정사(正史)로서의 신빙성이 크게 훼손된 만큼 각종 국사교과서에서 훈요십조와 관련된 내용들이 전면 삭제되어야 한다.

실제 역사가 그러했다면 비록 아쉬운 점이 있어도 인정하고, 냉정하게 공과를 평가한 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가 아님에도 망국적 지역 감정의 단초를 제공한 엉터리 사료를 진실인 양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말도 안 되는 거짓 역사에 끝없이 상처를 받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가짜임에도 지금까지 정사로 행세해 온 훈요십조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하루빨리 국사교과서에서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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