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경술국치일(1910년)이다. 이날은 백범 김구의 생일이기도 하다. 1876년 8월 29일 태어난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웠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흠모해 마지않는 인물이다. 시인 신경림은 저서 ‘백범 김구’에서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언제나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은 17세 때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갑오농민혁명 당시 동학군 700여 명을 이끌고 해주 관아를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숨어 있다가 만주로 도망가 의병대에 동참했다. 1896년 일본군 중위를 살해하고 붙잡혀 사형이 선고됐지만 고종의 특사로 형이 중지돼 수감돼 있다가 1898년 탈옥했다.
충남 공주시 마곡사에서 숨어 지내다가 절에서 나온 뒤에는 고향에 학교를 건립해 교육운동을 벌였다. 이후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령을 역임했다. 1932년 이봉창 의거를 주도하고, 같은 해 윤봉길에게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죽이게 했다. 1933년 장제스(蔣介石)와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만들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올랐다.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그는 민주의원 총리, 비상국민대회 회장, 한독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분단을 막으려고 1948년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북한 지도자와 평양에서 담판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자서전 ‘백범일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