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끝나지 않은 전쟁 ⑩]조선 유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을까?

입력 2016-09-02 11:07 수정 2016-09-05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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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도 연암도 ‘한사군=요동’ 믿었는데…식민사학자 ‘평양설’ 주장했다고 왜곡

이덕일 역사학자·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확정지었다. 한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런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한반도설’은 조선총독부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약용 선생도 식민사학자란 말이냐?”라는 엉뚱한 논리까지 등장했다. 다산이 살아 계셨다면 그분의 애국심으로 조선총독부 사관 옹호에 나섰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모든 현상에는 뿌리가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기자(箕子) 숭배사상 때문이었다. 은(殷)나라 사람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기사를 가지고 평양으로 왔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모국이 동이족 국가였던 은(殷)나라라는 점은 둘째치더라도 기자가 온 곳은 평양이 아니다. <사기> ‘송미자 세가’ 주석인 ‘사기집해’에는 “두예(杜預:222~285)는 기자의 무덤이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있다고 했다”는 구절이 있다. 양국 몽현은 지금 허난성 상추(商丘)시다.

서기전 12세기 때 사람인 기자의 무덤을 평양에서 찾기 시작한 때는 서기 12세기경이다. 고려사 예지에는 숙종 7년(1102) 예부(禮部)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는 기자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도, 사전(祀典:제사 규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를 따랐다고 전한다. 그러나 24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허난성에 묻혔다는 기자의 무덤을 평양에서 찾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고려사 예지는 충숙왕 12년(1325) 10월 “평양부에 명을 내려 기자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14세기 들어서 평양에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기자가 평양에 왔다는 것은 유학자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유학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만들어진 역사이지 실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유학이 개국이념이었던 조선에서 이런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어 ‘기자→위만→한사군’이 모두 평양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1차 사료를 직접 검토하는 실학적 학풍이 유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학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서 찾은 정약용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의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지금 사람들은 낙랑군 소속의 여러 현이 요동에 있었다고 많이 생각한다”고 부기했을 정도로 다산 생존 시의 많은 학자들은 낙랑군의 소재지를 고대의 요동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남인 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인물은 성호 이익이었는데, 그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에서 “낙랑군, 현도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베이징 부근인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곳이 낙랑이라면 낙랑은 평양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삼국지> ‘위서(魏書)’ 가평(嘉平) 4년(252)조에 보면 관구검은 진남(鎭南)장군이 되어 중국 남방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데, 평양으로 퇴각한 관구검이 수군을 동원하지 않는 한 중국 남방 지역에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때 중요한 것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패수인데, 현재 식민사학계는 그 위치를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운운하고 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생각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은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학자군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약천집(藥泉集)> 패수(浿水)조에서 “패수가 요동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하고, 답 이찰방 세구(答李祭訪 世龜)에서는 “현도, 진번은 지금 요동의 여진 땅에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시양(金時讓:1581~1643)도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낙랑현도대방은 다 요동에 있었던 땅이다”라고 요동설을 주장했다.

이처럼 조선에도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본 학자들은 적지 않았다. 박지원은 앞의 도강록에서 당서(唐書) 배구전(裴矩傳)을 인용해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했고, 한(漢)나라 때 사군(四郡:당서 원문에는 3군으로 나옴)으로 나누었다”면서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다”고 말했다. 한사군이 청나라 때 영평부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영평부는 지금의 허베이성 노룡현인데, 청나라 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영평부 조에서 “조선성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라고 낙랑군이 현재의 허베이성 노룡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송(北宋)의 낙사(樂史:930~1007)가 편찬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물론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낙랑군은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에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던 식민사학이 이제는 조선의 유학자들의 품으로 도피한 셈인데, 정작 조선 유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꾸짖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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