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년 전 ‘여권통문’ 공표한 9월1일을 ‘한국 여성의 날’로”

입력 2016-09-09 18:10 수정 2016-09-1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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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통문’과 세계의 여성인권 선언들 (상편) - 새로운 세상을 위한 분발지심 -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와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가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덕성여자중학교 대강당에서 개최한 ‘여권통문’ 기념식에서 덕성여중 학생들과 참석자들이 ‘여권통문’이 적힌 인쇄물을 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날 기념식은 한국 여성인권운동의 표상인 여권통문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아가 이날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사진제공 역사여성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와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가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덕성여자중학교 대강당에서 개최한 ‘여권통문’ 기념식에서 덕성여중 학생들과 참석자들이 ‘여권통문’이 적힌 인쇄물을 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날 기념식은 한국 여성인권운동의 표상인 여권통문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아가 이날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사진제공 역사여성미래

“슬프도다. 전일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압제하려고 한갓 옛날을 빙자하여 말하되 여자는 안에 있어 밖을 말하지 말며 술과 밥을 지음이 마땅하다 하는지라. 어찌하여 사지육체가 사나이와 일반이거늘 이 같은 압제를 받아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 모양이 되리오.”

1898년 9월 1일 한양 북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인 이소사와 김소사가 조선 여성들이 처한 참혹한 처지를 언급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주장을 담은 이른바,‘여권통문’을 발표하였고, 위의 인용문은 후미의 한 구절이다. 이는 바로 118년 전 오늘인 9월 8일에 황성신문, 9월 9일에는 독립신문, 그리고 9월 10일에는 독립신문의 영자신문(The Independent)에 연일 실리면서 조선 여성들의 기함을 보여주었다. 이소사와 김소사의 이름에서 보듯이, 양민 신분의 과부들에게 붙여지곤 하는 수많은 ‘소사들’에서부터 이름깨나 알려진 양반 집안의 부인, 기생 등 300여 명에 이르는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이 착명에 참여했으니 오늘로 치자면 자신의 딸들을 여학교에 보내겠다고 서명을 한 셈이다. 바로 뒤이어 9월 12일에는 조선 최초의 여성단체 ‘찬양회’가 설립되었고 이듬해 4월에 순수민간 자본에 의해 순성여학교가 설립되었으니, 9월 1일 ‘여권통문’의 공표는 일대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내포된 사상, 내용, 주장이 여성의 인권을 환기시킨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1898년 9월 ‘여권통문’을 보도한 신문들
▲1898년 9월 ‘여권통문’을 보도한 신문들

‘여권통문’은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담고 있다. 전반부에서 여권통문의 발기자들은 남성과 똑같이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으나 ‘구습’으로 인해 평생 무력하게 집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성들의 처지에 일침을 가한다. 이는 고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조선사회의 낡은 관습과 전통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에 뒤이어 그 다음 구절에서,‘여권통문’은 개인적 차원에서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압제를 혹독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일신우일신해야 하는 개명천지의 시대에 남성의 위력과 압제로 여성은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와 다르지 않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문의 발기자들은 이 모든 규제들을 철폐하여 문명개화의 시대로 나갈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여성의 교육권을 주장하며 여학교 설립에 동조하고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여권통문의 공표는 19세기 말 조선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격변과 맞물려 있었다. 박해를 받으며 성장한 천주교, 동학혁명, 문명개화의 요구, 그리고 서구 문물의 유입은 조선사회의 신분적 질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그 가운데 경제적, 법적, 교육적으로 가장 열악한 상태에 있던 여성들의 권리 주장은 신분적 질서에 근거한 조선사회의 균열을 알리는 또 다른 표시일 수 있었다. 여권통문은 사회가 개명·진보하여,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여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나중에 ‘여성군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전면에 드러낸 주장은 여성의 교육권이며, 집안에 들어앉아 남자들이 벌어다 주는 것에 의존해서는 아니 되고 세상 형편을 알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직업권과 참정권에 대한 요구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여권통문’의 주장은 다른 공간, 그리고 다른 시대의 여성인권 선언들을 떠올리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세계적인 여성인권 선언들의 계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의 진행 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올랭프 드 구즈가 1791년에 공표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 1848년 미국 뉴욕 주의 세네카 폴즈에서 개최된 ‘여성권리대회’에서 공표된 ‘공감의 선언’, 그리고 러시아혁명의 결과물로서 1917년 11월 2일에 보편적 남녀평등을 공포한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에 뒤이은 일련의 법령들을 꼽아볼 수 있다. 물론, 올랭프 드 구즈의 ‘선언’은 1789년 여름에 공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틀을 빌려 17조와 장황한 서문과 후기를 포함해 담고 있다. 1848년의 ‘공감의 선언’은 1776년의 ‘독립선언서’의 언어와 형식에 여성을 적용한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 혁명기에 공표된 선언은 보편적 권리에 뒤이어, 3년에 걸쳐 공표된 이혼권, 시민권, 결혼권, 가족 및 친권 그리고 낙태권을 포함한다.

우리의 국어사전에서는 선언서 혹은 선언문에 대해 ‘어떤 일을 널리 알리는 내용을 적은 글’이라고 쓰고 있다. 역사 속에서 선언의 행위는 언제나 존재했고, 특히 근대 이후, 나라 안팎에 다양한 용례가 나타난다. 대한독립선언(1918), 2·8독립선언(1919), 3·1독립선언(1919)에서부터 유엔의 세계인권선언(1948) 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지만, 여성들의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선언은 매우 드문 편이다. 여권통문이 황성신문에 소개된 지 118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선언의 적극적 의미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선언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 해결을 요하는 내용들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후대인들에게는 따라야 할 전범이면서 실현해야 할 당위이다. 또한 당대의 시대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미래의 세대에게 늘 나침판처럼 작동한다. 여권통문을 널리 알려, 차제에 9월 1일이 ‘한국 여성의 날’이 된다면 그것 자체가 의미있는 또 하나의 선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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