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끝나지 않은 전쟁 ⑫·끝 ] 한국 실증주의 사학의 실체

입력 2016-09-2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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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문제는 역사 연구의 방법론이 아니라 식민사관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에서 끊임없이 식민사관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또한 한국사 서술을 두고 실증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해 찬반이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고 있는가. 한국사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먼저 한국사의 논란은 근대 역사학의 수용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독일 역사학자 랑케로부터 시작된 근대 역사학은 철저한 사료비판을 토대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서서술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역사는 고증을 바탕으로 한 사실 위주의 서술이었던 반면 이전의 서구 역사는 대체적으로 신화 혹은 영웅을 찬양하는 서사시나 전기 혹은 영웅담 등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예전의 역사학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목적으로 과학적 역사를 추구한 근대 역사학이 바로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으로부터 시작했다. 이후 철학에 속했던 역사학이 독자적 학문이 됨으로써 예전에 주로 문학가나 혹은 정치가의 영역에서 다뤄졌던 역사학은 이제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들의 몫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랑케의 제자인 리스에 의해서 일본에 전격 수용되었다. 19세기 유럽이 해외로 진출하여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 역시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한 근대화 과정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적 기반이 절실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일제는 제국대학을 통해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수용하게 된 이유이다. 그렇다면 랑케의 실증주의는 어떤 역사학일까.

▲랑케가 신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계기가 된 라히프치히 전투 장면. 랑케는 후에 ‘강대국론'을 저술했으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실증주의 역사를 창시했다.
▲랑케가 신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계기가 된 라히프치히 전투 장면. 랑케는 후에 ‘강대국론'을 저술했으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실증주의 역사를 창시했다.

19세기 이전 유럽에서 독일은 약소국이며 가난하고 분열된 국가였다.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오랜 동안 침략과 약탈을 당하며 고통받아 온 독일 민족은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 침략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랑케는 과거 역사에서 독일 민족정신을 찾고자 고대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랑케는 로마제국 혹은 강대국으로부터 지배를 당하면서 독일 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사실을 깨닫고 올바른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이 열망에 의해 랑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한 근대 역사학을 창시한 것이다. 철저한 사료를 비평하여 사실적인 것만 기록하고자 한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은 일제에 전해지면서 일본의 근대 역사학의 발판이 되었다. 일제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수용하여 자국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할 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실증주의 역사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은 그 어떤 사상이나 개인적 생각을 개입시켜선 안 될, 소위 ‘무색무취’의 역사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랑케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학이 제국의 이념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일제의 역사가들은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제국의 정치적 이념에 부합한 역사학으로 바꾸고자 했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소위 ‘동양사’이며 일제가 조선 및 동양을 지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는 역사적 근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랑케의 제자 리스로부터 역사학을 배운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사학과를 중심으로 한 이들 역사학자들과 만철 조사부에서 근무한 역사가들이 그 주역이었다. 특히 이들은 랑케의 저서 ‘강국론’을 이용하여 제국주의에 부합한 역사관을 만들어냈다. 이 저서는 랑케가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들의 역사를 살피면서 역사적으로 강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며 이들 민족의 역사와 문화, 언어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랑케는 이 저서를 통해 강국이 약소국을 지배해 온 역사가 보편적 흐름이었다며 강대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강력한 민족국가를 수립하여 국가 간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강국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 논리에서 일제 역사가들은 힘의 균형을 빼고 강대국이 약소국 지배의 역사적 보편적 흐름만 차용했다. 즉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이 역사의 보편적 흐름이기 때문에 근대화를 이룬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해 지배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독일 역사학자 랑케
▲독일 역사학자 랑케
원래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은 민족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강대국이 되려면 민족정신이 고취되어야 하는데 민족정신은 곧 민족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민족의 역사는 개별적이며 특수한 것으로 각 시대마다 ‘신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는 ‘과거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 그러므로 랑케는 역사에서 개별과 특수성으로부터 보편성에 이른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다민족 국가이다. 제국주의에서 역사는 각 민족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무사하고 보편성을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일제의 역사가들도 민족역사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보편적 역사를 강조했다. 보편적 역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관이다. 이로써 일제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를 제국주의의 역사적 이론으로 변용시켜 ‘일제식 실증주의 역사학’을 만들었다.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핵심은 객관성과 과학성이다. 때문에 일제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이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으로 포장되어야 그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의 식민지배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는 제국주의 역사적 기초는 이렇게 변용된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에서 이뤄졌다. 이 식민사관은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한국인 역사가들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제 역사가들에 의해 변용된 일제식 실증주의 역사학을 배운 한국인들이 각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한국 역사가들은 랑케의 실증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역사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 한국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역사학임을 간과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이 민족이념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됐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랑케와 달리 일제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보편성으로부터 개별성으로 나아간다며 보편성을 강조한다. 결국 한국 실증주의 역사학의 기초는 본래의 랑케 실증주의가 아니라 ‘일제식 실증주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이 오늘날 한국 역사학에서 식민사관 논란이 지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임종권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임종권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필자 소개

임종권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프랑스 지식인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 사학과 초빙교수 및 베어드학부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유럽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프랑스 지식인 세계’, 역서 ‘프랑스 근대 저널리즘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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