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살풍경 공화국

입력 2016-09-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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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가을이다. 그 뜨겁던 여름이 지나가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좀 살 것 같다. 하지만 편해진 건 날씨밖에 없는 것 같다. 북한의 핵실험과 영남지방의 지진이 불안을 키우고, 각종 비리 의혹과 갈등, 쟁투는 오히려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아주 보잘것없는 풍경, 흥을 깨뜨리는 광경이 살풍경이다. 당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의산잡찬(義山雜簒)’에서 처음 쓴 말이다. 좋은 경치를 파괴하거나 도덕적인 기본 질서를 무시하는 꼴불견 행태도 살풍경이다.

그가 말한 살풍경은 여섯 가지가 많이 알려져 있다. 청천탁족(淸泉濯足, 맑은 샘물에 발을 씻음), 화상쇄곤(花上晒褌, 꽃 위에 잠방이를 말림), 배산기루(背山起樓, 산을 등지고 건물을 지어 산세를 못 보는 것), 소금자학(燒琴煮鶴, 거문고를 때서 학을 삶아 먹는 것), 대화철차(對花啜茶, 꽃을 마주해 차를 후루룩 마심), 송하갈도(松下喝道, 소나무 숲에서 쉬는데 “쉬, 물렀거라” 하며 사또 지나가는 소리). 참 멋없고 흥을 깨는 일이다.

다른 게 더 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른 것도 있다. 간화누하(看花淚下, 꽃을 보며 눈물 흘림), 태상포석(苔上鋪席, 이끼 위에 돗자리를 폄), 작각수양(斫却垂楊, 수양버드나무를 찍어 없앰), 화하쇄곤(花下曬褌, 꽃 아래에서 잠방이를 말림), 유춘중재(遊春重載, 봄놀이를 가면서 먹을 걸 잔뜩 싣고 감), 월하파화(月下把火, 달 아래에서 불을 지핌), 석순계마(石筍繫馬, 석순에 말을 매어둠), 기연설속사(妓筵說俗事, 기생하고 놀면서 속세의 일을 말함), 과원종채(果園種菜, 과수원에 채소를 심음), 화가하양계압(花架下養鷄鴨, 꽃시렁 아래에서 닭과 오리를 침), 선승비응(禪僧飛鷹, 참선하는 중이 매를 날림) 등이다.

그가 말한 살풍경이 정확하게 몇 가지인지 원문을 보지 못해 알기 어렵다. 어떤 자료는 여섯 가지라고 하고, 다른 자료는 열두 가지 또는 열세 가지라고 하니 헷갈린다.

살풍경을 보탠 사람도 있다. 명나라의 문인 황윤교(黃允交)는 고취유산(鼓吹遊山, 북 치고 나팔 불며 산놀이를 함), 청가설가무(聽歌說家務, 노래를 들으며 집안일을 말함), 송림작측(松林作厠, 솔밭에 뒷간을 만듦), 명산벽상제시(名山壁上題詩, 명산의 바위벽에 시를 지어 새김) 이런 걸 살풍경이라고 했다.

목은 이색의 ‘군수 이공(李公)의 방문에 감사하며’[謝郡守李公來訪]라는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주인인 내가 꽃을 마주하여 차를 마시니 이 곧 살풍경이라, 천치 같은 늙은이 이 지경 되었으니 어찌할꼬.”[主人啜茶殺風景 老癡至此何爲哉] 꽃을 마주하여 차를 마시는 게 왜 살풍경인가. 차 대신 술을 마시라는 건지, 채신머리없이 후루룩 마시는 게 살풍경이라는 건지.

지금 우리의 살풍경은 어떤 것들일까? 미르재단 등의 비리 의혹이 제기되자 사회불안 운운하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 지진이 일어날 경우 환경부 장•차관에게는 ‘가능한’(가능한 한이 맞다!) 심야시간에 전화하지 말고 다음 날 아침에 보고하라고 한 기상청의 매뉴얼, 이런 게 살풍경 아닐까? 국사에 지쳐 주무시는 분들은 깨우지 말라는 거겠지?

2016년 대한민국의 살풍경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각자 일삼아 꼽아 보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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