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이중섭 시대의 사랑-따라하고 싶지만 재현돼서는 안 될

입력 2016-10-0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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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주간

내 속, 사랑이 메말랐나. 이중섭 전시회에서 ‘사랑과 그리움’에 흠뻑 젖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다. 그는 1916년에 태어나 만 40년을 살고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림과 사진 등 수백 점 전시품 가운데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 앞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 평전과 편지모음집들을 읽으며 느꼈던 그의 아내 사랑, 자식 사랑의 깊이와 뜨거움이 육필 편지를 보는 내 가슴 속에서 뭉클뭉클 솟아났다.

그는 일본 유학 초기인 1938년 미술학교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43년 어머니와 형이 살던 원산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태평양전쟁이 심화돼 일본으로 다시 떠날 수 없었다. 애인이 죽도록 보고 싶었지만 편지조차 현해탄을 건널 수 없는 시국이었다. 대신 1945년 4월 마사코가 연락선을 타고 원산으로 온다. 이 배를 마지막으로 한일해협에서 일본 배는 사라진다. 미군 폭격 때문이었다. 마사코는 사랑을 찾아 목숨을 걸었다. 5월에 둘은 원산에서 혼례를 올렸다. 아들 둘을 낳고 행복을 누리지만 6·25전쟁이 터진다. 사랑의 비극이 시작된다.

1950년 12월, 둘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온다. 모진 추위와 눈보라, 혹독한 배고픔뿐인 곳이었다. 그림은 접었다. 그러다가 따뜻한 곳을 찾아 서귀포로 건너간다. 1951년 1월이다. 거기서 한 주민의 배려로 빌려 얻어 산 곳이 지금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옆에 남아 있는 ‘이중섭 거주지’의 그 방이다. 아파트 화장실보다 약간 크고 아궁이 하나에 옷가지 몇 점 걸쳐놓을 시렁뿐인 방 같지 않은 방, 그 좁고 누추한 곳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남루(襤褸)는 계속됐지만 부산보다는 편했던지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림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따뜻하고 아늑한 행복감을 받는, 발가벗은 아이들이 천진한 미소로 게, 물고기 등과 함께 등장하는 그림들이 이때 많이 그려졌다. 평전 작가들은 이때를 ‘그의 마지막 행복한 시기였다’고 썼다.

1951년 12월 그는 다시 부산으로 건너간다. “재능을 발휘하라”는 친구들의 격려와 재촉이 그를 부산으로 불렀다. 하지만 가난과 궁핍이 더욱 심해지자 부인은 그해 7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떠난다. (전시장에 전시된 수많은) 편지에 아내와 아이들 그림을 그려 넣는 걸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던 그는 이별 1년 만인 1952년 7월 친구들이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외항선원증)으로 일본에 가서 아내와 아들을 만난다. 가족은 그가 머물기를 바랐지만 가난뱅이 화가가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리려고 하느냐는 장모의 힐난을 받고 바로 부산으로 돌아온다.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부산에 돌아온 그는 아내와 아들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떳떳한 가장이 되기 위해 자기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인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굶주려가면서. 두어 차례 큰 전시회를 열고 호평을 받으며 그림을 팔지만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림도 상품’이라는 자본주의의 등식을 체화하지 못했던 그는 팔린 그림을 다시 찾아 온 적도 있다.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니어서 다시 그려주겠다는 이유로. 어쩌다 들어온 돈은 못된 친구들의 술값으로 나갔다. 일본 갈 배표를 사려던 돈도 못된 친구가 손을 벌리면 씩 웃으며 그냥 내주었다. 사기도 당했다. 아는 사람들이 사기범이었다. 그러다가 더 굶어 속병이 든다. 정신병도 따라왔다. 1956년 9월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죽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어 행려병자로 취급됐다. 죽기 전 그의 사진은 그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의 아내 사랑을 생각하면, 그는 그림을 위해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그림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을 것 같다. 전시장의 편지들에서 그런 걸 읽을 수 있다. 고작 몇 줄 따서 옮기는 게 그 사랑을 훼손할 것 같아 두렵지만 그래도 몇 줄 옮겨본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애처와 오직 하나로 일치해서 서로 사랑하고,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참인간이 되고, 차례차례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염원이라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마음의 아내, 오직 하나뿐인 천사, 그대와 함께 있어야 나의 생활은 눈을 뜰 것.”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걷잡지 못할 제작욕에 불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오.” “나는 조선의 정직한 화공(畵工)”이라고 쓴 편지는 스스로를 ‘화가’라고 이르기엔 부족하다는, 자기 낮춤을 담고 있다.

편지를 숨죽이면서 하나하나 다 읽는 사람들은 나 말고도 많았다.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 같다.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사랑이 무언지, 아내와 자식이 무언지를 다시 생각하면서 전쟁이 무언지, 가난과 비참이 무언지, 그것들이 어떻게 한 삶을 파괴하고 한 가정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중섭의 사랑, 너무 순수해서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사랑이지만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는 사랑이다. ‘불운한 시대, 불운한 사랑의 주인공!’ 아름답지만 그 불운과 슬픔은 겪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랑 없어도 좋으니 그런 시대는 안 왔으면 좋겠다.

전시회는 3일 끝났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이중섭의 사랑, 그 시대의 사랑을 느껴보고 싶어진 사람이 있다면 고은이나 고정일의 이중섭 평전, 박재삼이 엮은 그의 편지를 모은 책 등을 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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