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1851.11.17~1895.10.8)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연민은 깊다.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그녀를 애처롭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인지 그녀에 대한 평가는 늘 후하다. 조선의 국모로서 손색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 정서를 떠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그녀를 평가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나라를 망친 장본인’에서 ‘구국을 위해 몸 바친 여걸’이라는 평가까지 극단을 달린다. 왜 그럴까. 우선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왕비로서의 그녀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 명성황후의 행적을 기록한 대표적 역사서인 ‘고종실록’과 ‘매천야록’의 내용이 너무 다르다. 물론 ‘정사’와 ‘야사’라는 입장 차이를 고려할 수 있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를 들어 ‘매천야록’에는 그녀가 연일 연회를 베푸느라 국고를 탕진한 것으로 돼 있으나, ‘고종실록’에는 사치와 관련된 어떤 언급도 없다. 거기에 두 역사서의 신뢰성에도 문제가 따른다. ‘고종실록’은 왜곡이 심해 사료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며, ‘매천야록’은 지방에서 떠도는 풍문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또 19세기 말 조선의 급박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이현령 비현령’ 식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도 평가를 어렵게 한다. 조선의 개방을 놓고 한쪽에선 그녀가 근대화를 명분으로 나라를 열었지만 막상 개혁을 할 시점에선 뒤로 물러났다고 비판하고, 다른 쪽에선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위기의 역사에서 우리가 늘 보던 장면 같지 않은가.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분하다. 하지만 그녀를 살해(을미사변)할 정도로 일본이 위협을 느낀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대환 편집위원 daehoan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