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5일 대국민 사과를 통해 ‘비선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 씨에게 연설문 등을 전달한 사실을 밝히며 청와대 내부문서가 외부유출 됐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후속 대책이나 참모진 문책 없는 ‘반쪽짜리’ 사과라며 일제히 비난 공세를 퍼붓고 있어 논란의 불씨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춘추관 2층 브리핑룸에서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대국민 사과문을 직접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사과문에서 “최순실씨는 지난 대선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고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 물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맘으로 한 일인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사과’ 라는 표현을 쓴 것은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대국민담화 이후 이번이 두번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덴마크 총리와의 정상회담과 오찬 등 공식 일정을 소화한 뒤 대국민 사과를 전격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박 대통령이 의혹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신속하게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 것은 이번 사안이 국정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메가톤급 폭풍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국민 사과’를 통해 정면 돌파에 나서지 않을 경우 국정 운영의 동력이 약화됨은 물론, 여론 악화로 사실상 레임덕이 빨라질 수 있다는 판단도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최순실씨에게 연설문을 사전 검수 받았다고 인정하자 전 국민들이 충격이 빠졌다. 청와대에 유능한 참모들이 많은데, 어떻게 일개 자연인에게 대통령 연설문을 검수 받을 수 있냐며 심각한 국기문란 행위라며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정치권도 여야할 것 없이 비난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이날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기만 하고, 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도 받지 않고 들어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도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대통령이 전혀 상황인식이 없는 것 같다”며 “대통령은 개인적인 일에 대한 감상적인 유감 표명에 그쳤다”고 꼬집었다.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중진인 김용태 의원은 이날 박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다. 새누리당 의원 중에서 박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한 것은 김 의원이 처음이다. 문서유출을 일벌백계 하겠다던 박 대통령이 직접 ‘문서유출’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바꾸기 논란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14년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일명 ‘정윤회 문건’을 유출했을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문건유출은 국기문란 행위” 라며 “누구든지 부적절한 처신이 확인될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벌백계로 조치할 것”이라고 엄포한 바 있다.
청와대 역시 지난 20일 한 언론이 최순실씨의 측근인 고영태 씨의 입을 빌려 “최씨가 제일 좋아하는 건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고 보도한 것에 대해 “말이 되는 소리냐”고 반박했고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도 지난 21일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관련 의혹에 대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이날 오전까지도 “모든 경위를 파악 중”이라며 침묵을 지켰던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를 통해 관련 의혹을 사실상 인정하면서 결국 ‘거짓 해명’을 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