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기획 도전하는 여성_(17)이경미 영화감독]“여성이라는 차별성이 장점 될 수도… 자신감 갖게 됐죠”

입력 2016-10-27 10:12 수정 2016-10-2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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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에게 여성감독으로서의 롤모델? 제가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신태현 기자)
(신태현 기자)
지난 24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제36회 영평상 감독상을 영화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손예진이 여자 연기상을 수상했다.

한 주쯤 전 만나 인터뷰했던 이경미 감독에게 축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외국에 있는터라 답신은 늦었지만 기쁨이 느껴졌다. 극장을 찾아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적었다. 약 25만 명. 이 감독이 ‘미쓰 홍당무’ 이후 8년이나 걸려 내놓은 두 번째 상업 장편영화 ‘비밀은 없다’는 그러나 IP TV와 VOD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입소문을 탔다. 이 감독도 “갑자기 인터뷰 요청이 밀려와 왜 이러나 했다”며 웃었다.

‘잘돼가? 무엇이든’ 같은 평단에서 주목받았던 단편영화들보다 이 감독이 만든 두 장편영화는 한 마디로 독특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는 여자 주인공이고, 이들의 캐릭터는 처음엔 일상적인 듯하지만 이야기가 무르익을 수록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눈에 확 띈다. 영화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편이다.

과거 인터뷰를 보면 이 감독은 자신의 경쟁력은 캐릭터와 디테일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쓰 홍당무’의 주인공 양미숙(공효진 분), ‘비밀은 없다’의 김연홍(손예진 분)은 한국 영화에 없던 캐릭터이다. 양미숙은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였지만 ‘더 예쁜’ 러시아어 교사가 오면서 자리를 뺏기고 안면홍조증과 자폐적 성향으로 사람들의 비호감을 산다. 짝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분노를 실제 삽질로 표현하기도 한다. 김연홍은 방송인 출신 남편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자 온 힘을 다해 내조하는 예쁘고 상냥한 아내로 보인다. 그러나 딸의 실종 사망 사건을 겪으면서 급변한다. 사인(死因)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자신이 얼마나 딸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깨달으며 연홍은 비로소 입체적인 존재감을 획득한다.

전형성을 깨는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창출한 걸까. 이경미 감독의 나직한 음성이나 질문하면 바로 답하기보다 몇 초 정도 생각해보고 신중히 답하는 스타일을 보면 사뭇 다른 강렬한 캐릭터 창출의 이면이 더 궁금해진다.

“제가 ‘궁금한 인물’을 만드는 편인 것 같아요. ‘왜 그럴까’를 생각하고 그 행동들에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내가 갖지 못하지만 갖고 싶은 성향을 갖게 만들어요. 양미숙은 참 뻔뻔해 보이지만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소리를 질러가며 따지죠.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 못 하거든요. 그리고 양미숙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엔 이유가 있는 거에요. 들어봐 주어야죠. 김연홍은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습니다. 감정이 무너질 만도 한데 분노하거나 절규하지 않고 중심을 지켜요. 강한 멘탈을 가진 여성이죠”

하지만 대규모 투자를 받아 만들어야 하는 상업 장편영화를 공산품처럼 빨리 만들어낼 수도 없고, 작품을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투자를 받고 제작을 하고 극장에 거는 그 지난한 작업을 재미나 대리만족으로만 할 순 없다. 영화로 밥을 먹어야 하는데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도 없을 테고.

“흥행은 될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미래에 대한 공포는 늘 갖고 있죠. 없을 수가 없죠. 스물여덟에 직장을 그만 두면서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진학했을 때 모두들 미쟝센이니 몽타주니 하는 말들이 예사로운 이들 사이에서 저는 시험 볼 때부터 ‘콘티를 그리라’고 하니 ‘그게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해야할 정도로 무지했어요. 첫 장편 이후 두 번째 작품을 걸기까지 8년이나 걸릴 줄도 몰랐죠.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힘든 시간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안정적’이라고 할 만한 자리(?)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많이 돌아서 도전해 도착한 길이고 이 길에서 더 행복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극 연출가이면서도 장녀가 연극을 하는 건 못 보겠다고 연극영화과 진학을 반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대학도 얌전히 러시아어과로 진학했고 졸업 후엔 해운업체에서 3년을 근무했다. 하지만 일은 너무나 재미가 없었고 “못했다”고 한다. 우연히 한예종이란 학교가 있고 영화과는 실기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시험을 쳤는데 ‘의외의 획득을 잘 못하는’ 자신에게 예외적으로 운이 따라 합격을 했고 그 길로 사표를 냈다고 한다. 과감하다면 과감했을 그 도전은 싫어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잘 알았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영화 일을 내가 잘 할 것이란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는데(연기를 꿈꿨던 그는 감독 데뷔 이후이긴 하지만 ‘부당거래’ ‘건축학개론’ 등에 잠깐씩 출연한다) 고기도 비로소 먹어봐야 환상적인 맛인 걸 알듯 영화를 알게되자 참 재미있어 무섭게 빠져들었어요. 그래서 이걸로 계속 살아가고 싶었고 동시에 절박하기도 했죠. 그래서 ‘무(無) 쓸모의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 왔어요”

‘미쓰 홍당무’도 그렇지만 ‘비밀은 없다’는 결코 친절한 문법을 가진 영화가 아니다. 장르영화로서의 관습이 없다. 갑자기 연극적 장면이 등장한다든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숏들이 교차 편집되고 스토리도 얽히면서 파열음마저 들린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핫이슈인 페미니즘의 프레임을 갖고 보면 한없이 논쟁적 영화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이 영화를 여성 감독이 만들어서, 여성 캐릭터가 너무 부각되어서 흥행이 덜 됐다는 얘기까지도 들린다.

그러나 여성 감독이란 정체성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후배들에게 꼭 롤모델로서의 여성 감독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선례, 롤모델을 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지 않은가요. 세상은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잖아요. 개인별로 상황도 다 다르구요. 저는 감당하고 책임지질 수 있는 것을 말하고 행하자고 생각해요. 머릿 속으로야 이런 걸 만들면 사람들이 혹할 수 있겠구나 하는 구상들도 하지만요. 회사나 영화판이나 갈등이 있고 거친 건 마찬가지이지만 영화판이 오히려 여성이 자신만의 무엇을 가지고 동등하게 창작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 판에서는 재미있고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니까요. 게다가 지금까지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덜 보여졌고 그래서 개발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거죠. 단편 ‘잘 돼가? 무엇이든’으로 여성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바로 그 때 내가 여성이라는 차별성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구나란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친절한 금자씨’ 스크립터를 했고 첫 장편영화를 박찬욱 감독의 모호필름을 통해 제작한데다 스타일의 독창성 때문에도 이 감독은 ‘박찬욱 키즈’로 불리곤 한다. 거부감은 없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박찬욱 감독에 대한 평가로 답을 한다.

“박찬욱 감독은 한 번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자기복제나 동어반복을 않는 건 굉장히 어렵고 대단한 것이라 존경스럽죠. 창작자에게 중요한 미덕은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변주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거든요. ‘이 사람은 다음 영화에선 또 어떤 이야기를 할까’란 쾌감을 주는 예술가죠” 어쩐지 이 감독의 의지가 담긴 말로도 들렸다.

“흥행에 대해서 저 또한 끊임없이 생각하지만 정말 모르겠어요. 지금 결론은 그걸 예측하고 고민할 에너지가 있다면 오히려 창작에 쓰자는 겁니다. 뭔가 좋아하면 깊이 빠지고 에너지를 쏟아붓는 스타일이었는데 이제 에너지가 얼마 안 남아 잘못 쓰면 빨리 끝나겠다 싶어요. 걱정할 시간에 진짜 달려요. 뛰면서 몸을 다스리다 보면 마인드 콘트롤도 되구요. 그래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작품이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또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캐릭터를 만들 것은 분명합니다.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건 만들지 않겠다는 것, 그게 저만의 도전정신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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