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선생, 군인, 그리고 의사

입력 2016-10-27 10:50 수정 2016-10-2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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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뜻은 일의 형태와 분류, 즉 직군은 다를지언정 모든 직업은 각각의 고유한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의 형태는 달라도, 모든 직업의 종사자들에게는 책임감과 직업윤리가 동일하게 요구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여타 직업들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특정 직업군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즉 업무의 범위와 의사결정의 권한, 책임의 강도와 파급력의 측면에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높은 직업군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 상당히 많은, 그리고 심각한 문제점들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직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비극이다. 그들의 영향력과 책임감 간의 괴리감에서 발생하는 직업윤리의 실종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단순한 사명의식의 상실일 뿐이지만, 영향력이 큰 만큼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괴력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망각하는 순간, 직업을 가치 실현이 아닌 삶을 영위키 위한 도구만으로 선택하는 순간, 직업을 거룩한 부담이 아닌 개인의 안위와 편의만을 위한 디딤돌로 여기는 순간 균열과 비극은 시작된다.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든 최순실 사건의 시작은 어찌 보면 그녀의 딸인 정유라 문제에서 시작된다. 정유라의 대학생활은 총체적 부정의 집합체에 가깝다. 그녀는 입학과 출석 및 학점 취득과 관련하여 일반 학생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특혜를 받았다. 작게는 대학, 크게는 우리 사회의 상식과 원칙, 그리고 도덕성이 무너지는 그 아픈 과정 가운데서, 그와 같은 몰상식적인 특혜들이 수월하고 매끄럽게 반복될 수 있었던 것은 교수, 엄밀히 말하면 그들을 호칭하는 보통명사인 ‘선생’들의 변질에서부터였다.

1조 원. 지난해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이 중간 발표한 비리 금액이다. 총알을 막지 못하는 방탄복, 참치잡이용 어군탐지기를 설치한 구조함, 해상작전 능력이 없는 해상작전 헬기 등 우리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주적’은 바로 대한민국 내부에 있었다. 전직 해군참모총장 포함 총 63명이 기소될 만큼 군인이 변질됐는데 어찌 국가의 안보가 유지될 수 있으며 비리가 없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서는 군인의 운명이자 임무를 규정하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백남기 농민의 주치의였던 백선하 서울대학교 신경외과 교수는 정부의 물대포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라고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막고자 했던 백남기 농민을 죽음으로 내몬 공권력. 그리고 그의 죽음이 공권력의 남용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하고 이를 비호하는 백 교수. 그를 보면서 인류봉사에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며, 양심과 위엄을 가지고 의료직을 수행할 것이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들먹이는 것이 참으로 민망한 일이 되어 버렸다. 생명을 살리는 이외의 것과 타협하는 순간, 환자가 긍휼과 치료의 대상이 아닌 수단의 대상이 되는 순간 변질은 시작된다.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생, 군인, 의사들이 있다. 불우한 학생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주는, 자기 몸으로 수류탄을 막아 부하들을 살리는, 평생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이들이 그렇다.

세상의 모든 직업은 귀하다. 하지만 누군가 본인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직업 세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선생, 군인, 의사를 꼽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세 직군의 종사자들만큼은 ‘직업의 선택’이 아닌 ‘사명에의 헌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생은 젊은이들의 인생을 살리고, 군인은 국가를 살리며, 의사는 생명을 살리기 때문이다. 참선생, 참군인, 참의사를 만나고 싶은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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