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권력자의 중간책이 된 ‘전경련’

입력 2016-11-02 10:53 수정 2016-11-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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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 산업1부장

“돈을 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반대할 수 있는 기업이 있을까요? 그간 액수까지 적어서 내려오면, 그대로 냈던 것은 다들 아는 것 아닙니까.”

최근 만났던 기업 관계자들은 한결같은 말을 했다.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사태에 롯데 소진세 사장이 소환된 데 이어, SK, 삼성, 현대차, LG, 한화 등이 미르·K스포츠 강제 모금과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줄줄이 조사를 받거나 받을 예정이다. 재벌닷컴과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미르·K스포츠재단에 자금을 출연한 기업은 모두 53개사다. 이 중 절반에 가까운 23개사가 10억 원 이상의 출연금을 냈다.

현대자동차가 68억8000만 원으로 가장 많았고, SK하이닉스 68억 원, 삼성전자 60억 원, 삼성생명 55억 원, 삼성화재 54억 원, 포스코와 LG화학이 각각 49억 원을 냈다. 오너리스크가 있는 곳에는 더 집요한 요구가 이어졌다. 롯데그룹은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을 통해 미르에 28억 원, 롯데면세점을 통해 K스포츠에 17억 원 등 총 45억 원을 출연했다. 그러나 롯데는 추가로 70억 원을 요구 받았고, 이 금액을 냈다가 돌려받기도 했다. SK도 추가로 80억 원 출연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은 것은 기업이 순수한 의도에서 출연을 한 것인지, 아니면 박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인지하고 출연을 했는지 여부다. 만일 후자라면 뇌물로 볼 여지까지 있다. 줄소환이 기업에 부담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만, 관행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 같은 모금 행위는 전국경제인연합(이하 전경련)이 주도했다. 이승철 상근부회장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지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전경련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1968년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가 전경련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으로 출범할 당시 내세운 말은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경제정책을 구현하고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한다’였다. 그러나 이 목적은 어느 하나도 현재의 상황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올바른 경제정책, 우리 경제의 국제화는 작금의 상황에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울 정도다. 만일 강제성이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면, 이들은 기업의 건전한 경제 활동을 위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정권에 줄을 대고, 돈을 걷어 전달했다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힘을 가진 자에게 돈을 걷어주는 중간책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지금의 전경련이다. 또 얼마 전에는 어버이연합이라는 보수단체의 자금줄 역할도 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산 적도 있지 않은가.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경련의 존속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목소리를 내는 단체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의 전경련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정말 의문스럽지 않나요?”

전경련 설립 당시 모델로 삼았던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은 사회공헌의 하나로 회원사에 정치헌금을 거론한 이후, 올해로 3년째 헌금을 촉구해와 최근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앞서 1993년 게이단렌은 히라이와 가이시(平巖外四) 전 도쿄전력 회장 등 지도부가 “정치헌금 관행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했고, 2002년에는 한국의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비슷한 단체인 닛케이렌(日經連)과 합쳐 ‘니혼게이단렌(日本經團連)’으로 새롭게 출범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게이단렌의 사례처럼, 기업들의 관행적인 출연금은 흔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으로 포장된다. 이처럼 힘이 있는 사람에게 ‘기부금’의 형식으로 자금을 지원한 것이 CSR로 포장된다면, 지금까지 기업들이 해왔던 사회공헌이나 기부의 진정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CSR를 통한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 비용은 필요한 사람과 단체에게 오롯이 전달되어야 한다. 기업들은 현장에서 더 의미 있는 곳에 한정된 CSR 예산을 사용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는데, 정작 기업을 대변한다는 집단이 비윤리적인 일을 위해 의미를 훼손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혹자는 돈을 갖다 바친 기업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에게 '왜 맞서 싸우지 않았냐'고 무책임하게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는 바로 기업이다. 집단의 권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진정성을 전달할 수 없는 대표자라면, 이제 과감하게 그릇을 깨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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