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면서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각별히 여겨 관계 진전을 위한 노력을 별도로 경주하여 왔다. 그 결과로 러·일 간에는 활발한 고위급 양자 교류가 관찰되고 있다. 근자의 사례만 보더라도 올해 5월에 소치에서 러·일 정상회담이 있었고, 9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을 계기로 정상회담이 다시 열렸다.
이처럼 아베 총리가 계속 러시아를 방문하여 정상외교를 하자 미국 등 서방은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일본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진전시켜야 할 특수성이 있다면서 접촉 면을 늘려가고 있다. 다만 수도인 모스크바 방문은 피하고 대신 소치나 블라디보스토크 등 지방 도시에서 정상회동을 함으로써 미국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푸틴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도 방문하여 두 정상 간의 우의를 과시할 예정이다.
일본이 이러한 외교를 하는 배경에는 러시아와의 해묵은 현안인 소위 영토 문제가 놓여 있다. 홋카이도 북동쪽에 있는 하보마이, 시코탄, 쿠나시리, 에토로후 등 4개 도서는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일본 관할하에 있다가 2차 대전 말 소련이 점령한 이래 소련 관할로 들어갔는데, 일본은 이를 일본 영토라고 하면서 반환을 요구해 왔다. 아베 총리는 재임 중 이 문제를 풀고자 열심히 대러시아 외교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랜 현안이라는 점에 덧붙여 아베 총리의 전략에 영향을 주는 추가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근래 중국의 부상에 따라 심화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 간의 대립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일본 열도의 서남쪽 방향에서 중국과 센카쿠 섬(중국 지명 댜오위다오)을 둘러싼 영토 분쟁을 겪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둘째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래 러시아가 서방과 대립하면서 중국과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앞에 두고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이 연대하여 일본을 압박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일본이 열도의 서남쪽 방향과 동북쪽 방향 양쪽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동시에 영토 분쟁을 벌이는 일도 피하는 것이 낫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의 대립은 불가피하더라도 러시아와는 관계를 개선하고 영토 분쟁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러시아로서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바람직하다. 우선 서방의 제재하에 있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서방의 일원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제재 체제에 균열을 내는 의미가 있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일본이 가진 자본과 기술력은 러시아가 오랜 기간 추진해왔으나 별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있는 러시아의 극동 지역 개발을 위해 긴요하다. 아울러 러시아로서는 서방과의 대립 때문에 불가피하게 중국에 접근하고 있으나, 중국으로부터의 경제 협력이 미진한 데다가 중국이 곤경에 빠진 러시아의 처지를 이용하여 가스 가격 협상 등에 지극히 타산적으로 임하고 있어 내심 마뜩지 않아 하던 터이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중국 외의 협력 상대를 찾아 헤징을 해두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 내 일군의 전략가들은 러시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쪽에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 산업국들과 협력하면서, 동쪽에서는 일본을 비롯한 선진 산업국과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해 왔었다.
이 같은 이해가 맞아 들어가 양측은 관계 진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 5월 열린 소치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영토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대러 관계에서 새로운 접근을 언급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러시아와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본격적인 경제협력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인데, 이 부분에서 유연성을 시사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도 그간 지켜온 원칙을 언급하면서도 일정한 유연성을 내비쳐 호응하고 있다. 아베와 푸틴 둘 다 국내적 지지 기반이 탄탄하고 애국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으므로 유연성을 보일 소지는 있어 보인다.
그러면 영토 문제에서 어떠한 식의 타협이 고려될 수 있을까?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1956년에 이룩된 합의가 있다. 이에 따르면 소련은 하보마이와 시코탄 2개 도서를 일본 측에 넘기도록 되어 있다. 이 합의는 이행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일본은 입장을 전환하여 4개 도서 모두 반환을 요구해 왔다. 2개 도서의 면적은 아주 좁아서 전체 4개 도서의 7% 정도에 불과하다. 러시아 쪽에서는 한때 1956년 합의 이행을 중심으로 타협하려는 기류도 있었으나, 근래 국내적으로 민족주의 기류가 부상한 탓에 이제는 당시 합의로 돌아가는 데 대한 지지가 낮은 형편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일본 언론에서 흘러나온 일본 정부 내 검토 방안들이다. 확인되지 않은 것이므로 오차를 전제로 소개한다면, 하나는 1956년 합의를 이행하고, 나머지 2개 도서에 대해 러·일 양측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안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호의를 갖기 쉽지 않은 방안이다. 나머지 2개 도서의 주권이 러시아에 있다고 명시된다면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4개 도서 모두에 대해 공동 관리를 적용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주권은 어디에 있는지, 이 지역이 어떠한 법적 지위하에 있게 되는지 등이 논란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56년 합의를 우선 이행하고 나머지는 계속 협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방안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류시키는 것이므로 러시아가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일본 측이 무슨 방안을 제기할지 두고봐야겠으나 일본은 영토 문제에 대한 해법과 함께 적극적인 경협과 교류 구상을 함께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안이 12월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어떠한 추동력을 얻을지 주시할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러시아와 일본이 관계 발전의 공감대를 발견하고 앞으로 나가려는 강한 동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러시아와 서방 간의 전반적 관계 악화 속에서, 또 러시아와 중국 간의 공조가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특이한 것이고 주목 대상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이처럼 동적인 행보를 보이는 동안 한국은 대러시아 외교에서 정적이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이 설정한 제재 체제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와 양자 관계에서 적극적 행보를 하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양쪽 전선 모두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할 수 있고, 좀 비판적으로 말하면 양쪽 모두에 대해 회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이 한편으로 서방의 제재에도 가담하고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와 양자 협의도 강화하여 좌우로 꿈틀거리며 운신 공간을 만들어 나간 것과 달리 우리는 제재에 가담하지도 않고 대러 협의에도 소극적이었다. 처음에는 우리식 접근이 어느 쪽으로부터도 반발을 야기하지 않는 실리적 접근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시간이 갈수록 어느 쪽으로부터도 평가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우리의 운신 공간은 지속적으로 좁아졌다.
푸틴 대통령의 방일이 다가오고 러·일 실질 관계의 진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타협 구상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 주변 정세의 한 축이 변모해 나갈 개연성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한국 외교에 적시 대응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최순실발(發) 국내 정치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한반도 주변의 새로운 세력 구도는 가차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