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민, 반EU,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국민전선 대표 마린 르펜(Marine Le Pen·48)은 트럼프의 당선에 열광하고 있다. 그녀는 15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전혀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케 한 트럼프의 승리로 나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트럼프의 당선은 난폭한 세계화(wild globalization)와 엘리트들이 이끄는 정치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징표(a sign of hope)”라고 했다. 르펜은 프랑스 정치인 중 유일하게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는데 프랑스 언론은 그를 ‘트럼프의 분신(alter ego)’이라고 부른다.
연이은 테러로 고조되고 있는 반이민 정서에 힘입어 르펜은 현재 차기 대선 주자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결선투표에선 중도 우파 후보에 패할 것이란 전망이 지금까지는 지배적이었다. 프랑스 대선에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득표자가 결선투표, 즉 양자 대결을 치러야 하는데 2차 투표에서는 좌, 우 주류 정당이 소위 ‘공화전선’이라는 연대를 형성해 극우 세력의 집권을 막는 전통이 있다. 2002년 대선 때 르펜의 아버지이자 국민전선의 창립자인 장 마리 르펜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당선 이후 프랑스에서도 르펜의 당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 보수 정치인인 장 피에르 라파랭 전 총리는 RTL 라디오 방송에서 “(트럼프의 승리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르펜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도미니크 드 빌팽 전 총리도 “프랑스와 미국은 쌍둥이 같은 것으로, 비록 제도상 차이가 있더라도 미국에서 가능한 것은 프랑스에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세등등해진 르펜은 16일(파리 시간) 선거운동본부 개소식에서 “지금 세계 곳곳에서 통제되지 않는 세계화와 파괴적인 자유주의, 주권국가·국경의 소멸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이 같은 움직임이 내년 5월에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했다. 르펜은 또 “대통령이 되면 주변 국가와의 국경에 검문소를 다시 설치하고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종전의 공약을 재확인했다. 이에 앞서 그녀는 프랑스 공영 ‘TV France 2’에 출연해 트럼프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엘리트들이 민심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고 주장했다.
르펜 다음으로 ‘트럼프 효과’를 기대하는 프랑스 정치인은 이달 20일과 27일 우파 대선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다. 사르코지는 트럼프 당선에 대한 논평에서 “이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중국의 시진핑 같은 지도자에 맞서려면 약하고 무력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이 이들을 상대할 최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사르코지는 S파일(국가 안보에 위협된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신상을 기록한 파일)에 등록되어 있는 이들을 전원 수감 조치해야 한다는 등 강경한 테러 대응책을 주장하고 있어 극우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 사르코지 캠프의 대변인인 에릭 클로티 하원의원(프랑스 공화당)은 “트럼프의 당선은 세계적인 지각변동을 예고한다”며 “당장 이달 말에 있을 우파 경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여론조사보다는 국민들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르코지는 현재 여론조사에서 그의 경쟁자인 알랭 쥐페 보르도 시장(전 총리)에게 뒤지고 있다.
한편, 쥐페는 트럼프 당선 논평에서 “미국 국민들의 주권 행사를 주목한다”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선동과 극단주의가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과 그들이 해야 할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자신의 온건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좌파는 트럼프 당선을 일대 경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간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사회당 제1서기 장 크리스토프 캉바델리는 트럼프의 승리에 “경악했다”며 헝가리와 독일 등에서의 극우 열풍, 브렉시트, 그리고 트럼프 당선에 이르기까지 반이민, 민족주의 성향의 포퓰리즘이 서구를 사로잡았다고 논평했다. 그는 이어서 “이런 현상은 프랑스 좌파에 일대 경종인데, 이들은 무책임하고 유치한 짓만 계속하고 있으니 르펜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한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사임한 후 16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에마뉘엘 마크롱 전 경제장관(38)은 “트럼프의 승리는 시스템의 거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내가 파악하고 있는 프랑스 민심과 같은 맥락”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현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데 프랑스는 지난 30년간 현상고착”이라고 일갈했다.
프랑스의 환경정당인 유럽생태녹색당의 사무총장 다비드 코르망도 “이번 미국 선거는 좌우 간의 선택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establishment)에 대한 국민투표”라고 분석하고 “서구 전역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낮은 지지율 때문에 아직도 재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올랑드 대통령은 “트럼프의 당선으로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중동 문제와 세계 평화 등 모든 현안에 대해 새로운 미국 행정부와 조속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시리아 내전 등에서 오바마 행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해 온 올랑드 정부는 트럼프가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과 가까워질 경우 미국과의 대외 정책 공조에 엇박자가 예상된다.
프랑스 언론도 이번 미국 선거에 대해 다른 선거 때와는 다른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르몽드는 이례적인 영어, 불어 2개 국어로 내보낸 사설 ‘트럼프의 승리는 분노의 승리(With Donald Trump′s victory, anger has triumphed)’에서 브렉시트에 이은 트럼프의 승리는 프랑스에 또 하나의 경고라고 논평했다. 신문은 “대서양 양쪽에서 전통적인 엘리트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며 “불행하게도 미국 정치 엘리트의 완벽한 전범인 힐러리 클린턴은 현상 유지(status quo)의 표상으로 치부되었다”고 분석했다. 신문은 “트럼프는 이런 정서를 능란하게 이용했다”며 “그는 이민자, 자유무역, 엘리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승리했다”고 논평했다. 르몽드는 또 “트럼프의 당선은 서방 민주주의의 지진이며 게임의 룰을 바꾸는 사건(a game changer)”이라며 베를린 장벽의 붕괴나 9·11에 견줄 만한 사태로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가능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편, 보수 성향의 일간 르피가로는 ‘민중의 분노(La colore des peoples)’ 제목의 사설에서 “이것은(트럼프의 승리) 모든 것을 날려버린 허리케인”이라고 했다. 신문은 “모든 것이란 여론 조사와 전문가들의 예측, 엘리트들의 안일함, 기업인들의 확신, 정치인들의 자만과 언론의 오만”이라고 부연했다. 신문은 이어서 “서구 전역에서, 민중은 분노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외면해 왔으나 이제는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게 됐다”고 논평했다.
신문은 트럼프의 당선이 가난한 백인과 중산층의 지지로만 이루어졌다는 분석은 단순하다며 여성의 40%, 히스패닉의 3분의 1 이상, 흑인의 12%가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산업화로 번영했던 미국과는 달리 실직, 알코올, 교육제도의 실패, 가족제도의 붕괴 등으로 고통받고 분노하는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문은 유럽은 이런 분노의 전조 증상을 외면해왔다고 지적하면서 민중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트럼프 현상의 확산을 막는 것이 이제 시급한 과제라고 촉구했다.
프랑스 언론과 정치인들의 반응을 종합해 볼 때 트럼프의 승리는 유럽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매우 심각한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년 프랑스 대선은 이를 판가름 짓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