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트럼프 당선, 러시아의 기회 또는 유혹

입력 2016-11-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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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러시아 대사·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트럼프의 당선 소식은 러시아에서 낭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러시아 언론은 이 뉴스를 보도하면서 이제 제재와 대립으로 점철되었던 오바마-푸틴 시기 미·러 관계는 지나가고 트럼프-푸틴 시대의 새 관계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다.

그간 트럼프 후보는 유세를 하면서 푸틴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인 언급을 하였으며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그동안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잘못된 대러 정책을 해왔으니, 이제 정책을 수정하겠다는 공약이었다. 푸틴도 트럼프에 대해 호감을 표하여 호응하였다. 반면 클린턴 후보는 러시아와 푸틴에 대해 강경한 입장으로 일관하였다. 더욱이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의 컴퓨터가 해킹되고 클린턴에게 불리한 정보가 유출되는 일이 있었다. 민주당 측은 러시아가 배후라고 여겼다. 클린턴의 대러 정책은 더욱 부정적이 되었다. 그러자 트럼프는 러시아의 연루 여부에 대한 판단은 피해 가면서도 그러한 유출이 유익하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였다. 러시아는 의혹을 부인하였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를 둘러싼 논란의 경위가 이랬고 마지막까지 클린턴 당선이 유력하였으므로 중론이 향후 미·러 관계 악화를 점쳤는데, 트럼프 당선이라는 예상밖의 반전이 나오자 러시아는 더욱 반색한 것이다. 푸틴도 트럼프와 통화한 후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동안 미·러 관계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리미아 병합을 계기로 최저점을 향하고 있었고 작년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공습을 시작한 이래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지금은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의 주요 거점인 알레포에 대한 포위 공세의 막바지 고삐를 당기는 때라서 상황이 민감하다. 미국이 지원하는 반군이 제2도시 알레포를 빼앗기고, 뒤이어 인도적 재앙이 닥칠 경우 러시아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트럼프가 공약대로 미국의 국제 개입을 줄이고 국익을 위주로 사안별로 러시아와 협력하면, 미·러 관계는 나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파장은 여러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선 러시아가 미국의 개입 축소라는 새로운 환경을 활용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존재와 지원에 의존하여 균형점을 찾아 왔던 분쟁 지역의 여러 나라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된다. 이제 각국은 미국이라는 공공재가 줄어든 상황에서 새 균형을 모색하거나 심지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우선 러시아와 미국이 개입하고 있는 시리아에서 여파가 크게 일 것이다. 특히 미국이 개입을 축소하면서 IS를 비롯한 테러 그룹 대응에 집중하고 이를 위해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바꾸면 시리아는 물론 중동지역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푸틴과 트럼프가 통화하면서 테러 전 협력을 강조한 점이 눈길을 끈다. 트럼프의 외교안보 진용에 대테러 전을 중시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누구와도 협력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인사들이 다수이므로, 정책이 그 방향으로 갈 소지가 있다. 플린 국가안보 보좌관이나 폼페오 CIA국장, 세션스 검찰총장이 그 그룹이고 국방장관에 거명되는 매티스도 유사한 입장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그간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오던 시리아 반군의 처지가 어렵게 될 것이다. 아울러 미국과 함께 반군을 지원해 왔던 사우디 등 주변 국가들이 미국의 입장 전환에 대해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다. 그렇지 않아도 이슬람권에서는 트럼프의 친(親)이스라엘 성향과 트럼프 측근들의 반(反)이슬람 언행에 대해 우려가 큰 상태다.

러시아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러시아의 중동지역 내 영향력이나 운신의 폭을 넓혀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미칠 영향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는 유세 과정에서 러시아의 크리미아 병합을 인정하겠다고 언급한 적도 있다. 미·러 관계가 개선되면 우크라이나도 미국으로부터 이전만큼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등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울러 그간 러시아와 갈등 관계를 이어왔던 옛소련권의 조지아나 몰도바,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들도 미국의 존재감이 줄어드는 사정을 감안하여 정책을 재구성해야 한다.

한편 미·러 관계가 개선되면 그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고조되었던 러시아와 나토 간의 긴장이 줄어들 소지가 있다. 긴장 완화는 양측 전반에는 좋은 일이나, 결과적으로 발트 3국과 동유럽, 북유럽의 러시아 인접국들은 안보를 좀 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러시아는 자국의 서쪽 측면에서 나토의 압박이 완화되는 상황을 바람직하게 볼 것이며, 더 나아가 그 일대에서 군사력을 운용하기가 용이해졌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그동안 미국과 단합해 러시아에 대처해 왔던 유럽을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유럽은 미국의 정책 선회가 야기할 중동에서의 역학 변화와 우크라이나에서의 불확실성, 그리고 동유럽에서의 새로운 안보 수요 등을 두고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파장들이 유럽에 새로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유럽은 경제 침체, 브렉시트, 우익 세력의 부상, 반이민 반이슬람 정서의 대두 등 많은 내부적 난제를 안고 있어서 추가적인 외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 마침 트럼프가 유럽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시험에 들어가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로서는 미국과 유럽 간 논란이 증폭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대유럽 전략은 미국과 유럽 간의 간극을 찾는 접근에 기반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정적 결론은, 트럼프의 등장은 러시아에 고립을 탈피하고 외교적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러시아에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역설에도 주의를 돌려야 한다.

우선 소련의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재앙이라 부르고 러시아의 부흥을 지향하는 푸틴이 이 기회를 공세적으로 활용하려 할 경우, 러시아는 여러 지역에 과도하게 개입하게 될 소지가 있다. 국력에 걸맞지 않은 무리한 확장이 될 수 있다. 트럼프의 미국이 러시아보다 월등한 국력을 갖고서도 개입을 줄이려고 하는 사정인데, 러시아가 미국이 빠져나가는 자리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국력의 대외적 투사 노력은 정작 지금의 러시아에 필요한 내부 성찰과 국내 개혁을 저해할 수 있다. 러시아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경제 현대화와 이를 촉진할 국내 개혁이라는 것은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런데 대외적 운신의 공간이 갑자기 생길 경우 내적 체질을 강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적 환경을 활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내부 문제가 과제인데 국력을 넘어선 과도한 대외 확장을 하면 오래지 않아 그 괴리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소련의 경우가 극명한 사례였다.

요컨대 고립 탈피 이상의 행보에 유혹을 느낄 터이나, 기회 앞에서 절제를 떠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등장이 불러올 미·러 관계의 변화는 동북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북핵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사안을 두고 미국과 러시아가 과도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일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미.러 관계 개선은 미국의 동맹인 우리로 하여금 대러 외교를 활성화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이다.

반면 미국이 개입 정도를 낮출 경우 한반도 주변에도 다소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처해 새 균형을 잡는 일은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다만 공백을 채우는 일은 주로 중국의 몫일 것이므로 역내 역학 관계에 재적응해야 하는 우리의 고민도 러시아보다는 중국에 관해서일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은 러시아에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외교의 기회이기도 하고 동시에 위험한 유혹일 수도 있다. 한편 러시아와 연루되어 분쟁하고 있던 나라들에는 위기일 것이다. 한국에는 약간의 기회와 더 많은 고민거리를 가져다주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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