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의 어머니로 신라 최초의 섭정이다. 진흥왕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전까지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는 왕위 계승의 결격사유였다. 신라에서 ‘왕’을 뜻하는 ‘이사금(尼師今)’이라는 호칭이 잇금, 즉 치아를 많이 가진 자를 의미할 정도로 신라의 왕위 계승에서 연령은 중요했다.
더구나 진흥왕은 왕의 아들이 아니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입종갈문왕으로 법흥왕의 동생이었다. 이에 진흥왕이 법흥왕의 조카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에서 조카의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적은 없었다. 신라 왕실은 적통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을 매개 고리로 하여 사위나 외손이 가계를 계승해 왔다. 진흥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지소가 법흥왕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라 최초의 섭정
일곱 살, 어린 왕의 즉위는 섭정이라는 기이한 정치형태를 동반하였다. 어린 진흥왕을 대신하여 섭정한 것은 어머니 지소였다. 신라의 섭정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 여성이 자동적으로 담당한 조선시대 수렴청정과는 달랐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실권자가 섭정을 하는 것으로, 남성이 섭정자가 되기도 하였다. 지소가 진흥왕대 섭정을 했던 것도 진흥왕의 어머니라고 하는 혈연적인 요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흥왕 즉위를 전후해 신라 정계를 장악한 실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지소는 진흥왕이 친정을 하기까지 11년간 섭정으로서, 정치일선에서 국정을 통괄하였다.
섭정기 지소태후의 치적
지소가 섭정했던 시대는 신라가 발전하느냐 다른 나라에 병합되느냐 기로에 있는 격변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소는 병부와 사정부 등 관제를 정비하고,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는 등 대내적으로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추진하였다. 또한 신라 최초의 사원인 흥륜사를 완성시켰으며, 승려로의 출가를 허용하는 등 불교의 정착화에 힘썼다. 원시적인 유제였던 여성을 지도자로 하는 원화제를 남성을 지도자로 하는 화랑으로 개편한 것도 지소태후다.
그녀는 삼국의 영토 쟁탈전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소태후가 섭정을 담당했던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고구려와 백제 영토였던 한강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중국 대륙과의 통교로 국제적인 위상도 드높였다. 신라는 진흥왕대 대내외적으로 발전했는데, 지소태후가 섭정기에 안정적으로 기반을 마련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