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부결로 마테오 렌치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면서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중대 기로에 놓이게 됐다.
ECB는 오는 8일(현지시간) 열리는 올해 마지막 정례 회의에서 내년 3월 종료되는 1조7000억 유로(약 2122조 원) 규모의 채권 매입 프로그램을 연장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ECB의 채권 매입 프로그램은 올 한해 정치적 동요가 계속되는 가운데 유로존 19개국의 안전망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6월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과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 등 돌발상황이 벌어졌을 때 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막고 회원국의 국채 금리 상승을 억제했다.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서는 ECB가 양적완화(QE) 축소 시기와 방법에 대해 명확한 신호를 보낼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4일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물론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는 여론 조사에서도 부결이 우세한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의외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로존 내에서 일어난 일이자 역내 3위 경제국에 일어난 일인 만큼 ECB도 좌시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현재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보유한 이탈리아 은행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자본 확충이 즉각 필요한 은행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안정을 주도했던 렌치 총리가 사임하면 정국이 불안정해지면서 투자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서둘러 자금을 빼낼 것이고 이는 유로존 전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이탈리아 국민투표 부결에 ECB가 고민하는 이유다. 블랙록의 독일 담당 수석 투자 전략가인 마틴 뤽은 “ECB는 국민투표가 부결됨에 따라 이탈리아 은행의 재무 건전성 확보가 지연되는 리스크를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며 “ECB는 그러한 사태를 우선은 피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WSJ는 국민투표 이후 시장이 혼란스러워지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ECB가 전체 채권 매입액 중 이탈리아 국채 비중을 일시적으로 늘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는 ECB 정책 당국의 공식적인 결정없이도 가능하며, 2017년까지 이탈리아 국채 시장을 떠받쳐줄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ECB의 채권 매입 목적은 개별 국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차입 비용을 절감하고 대출과 경제 성장을 뒷받침해 유로존 전체 인플레이션율을 2%대로 유지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를 구제한다는 인상이 강해질 수도 있는 만큼 독일 등의 강대국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코메르츠방크의 요르그 크레이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채권 매입 방법 규칙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날 여유는 ECB에 없다”며 “그런 것을 하면 양적완화는 전면적통화거래(OMT)와 같은 인상을 준다”고 설명했다. ECB는 2012년 무제한 채권 매입책의 일환으로 OMT를 창설했지만 OMT는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다.
ECB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치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이탈리아 국민투표를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내년에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중요한 선거가 실시된다. 모두 포퓰리즘 세력의 약진이 전망돼 시장 혼란이 불가피하다. JP모건의 글로벌 시장 전략가 알렉스 드라이든은 “투자자들은 이탈리아 국민투표가 폭풍의 시작이 되어 그것이 유럽 각국에 미치는 걸 경계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폭풍에 대비하고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