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일했으면 됐지 않아? 뭘 더 악착같이 일하려고 그래” “상무까지 올라가 봤으면서 뭘 더 욕심을 내. 그만 해도 되지 않아?”
이런 류의 발언, 굳이 임원까지 해보지 않아도 어렵잖게 들을 수 있다. 기자도 많이 들어봤다. “그만큼 했으면 됐지 뭘 아등바등 더 일하려고 해?”
‘그만큼’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턱 걸린다.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달려왔고 이제야 ‘나’라는 인적자원이 입체적으로 활용 가능해진 것 같은데 ‘그만큼’이라니. 남성들은 아마 잘 들어보지 못했을 말이다. 많은 경우 가정의 중대사를 담당해야 하는 가장 역할을 남성이 하기도 해서 현실적으로는 자식 교육이나 혼사, 본인의 노후 문제까지 아직 해답을 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노후를 지낼 여유는 만들어졌대도 ‘명예욕’이나 ‘승부욕’으로 도전할 수 있는 장(場)인 직업이 필요하다고들 생각해서다.
똑같이 노력해 직장 들어갔고, 같이 경쟁해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여성에게는 적당히 일하다가 그만 두라는 말이 마치 배려하는 듯, 하지만 함부로라고 느껴지도록 쉽게 나오는 걸까.
오세임 보고인베스트먼트 전무도 이런 말 숱하게 들었다. 임원으로 재직했던 우리투자증권에서 나올 때도 그랬고, 서른 여섯 살에 한국씨티은행에서 나올 때엔 “다른 회사를 왜 가냐, 여성들 일하기 좋은 편인 이 곳에서 좀 더 일하다가 마흔쯤 퇴직하면 되지 않느냐”고들 많이 말렸다. 여성들이 극소수였던 대학 시절(연세대학교 수학과)에는 교수들로부터 “너희 여학생들 하나하나 지금 앉아있는 자리는 원래 한 남학생이 앉아있어야 했을 자리다. 사명감을 갖고 다녀야 한다”라는 말도 종종 들었다.
“학교 다닐 때엔 교수님의 그런 말씀에 수긍되기도 했어요. 분위기가 그랬거든요. 학교신문에선 이 학교에 이제 여학생의 비중이 10%를 넘었으니 큰일났다는 식의 기사도 나왔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왜 그런 성차별적 발언을 하느냐고 따질 생각은 하지도 못 했어요”
수학과 동기 여성들 대부분은 대기업 공채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 사람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선택했고 나머지는 교사의 길을 걷거나 공부를 더 했다. 여기저기 취직하려고 원서 넣고 시험 보려 다니는 사람은 오세임 전무밖에 없었다고.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기도 했죠. 그러니까 불안한 마음과 함께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잘 할 수 있는데 여성이라서 기회를 주지 않는 거라면 문제가 있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런 도전 정신은 얌전하게 공부 잘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에도 사실 대놓고 표출하지만 못했지 내재돼 있었다.
“누구를 꼭 이겨야겠다, 내가 더 잘 해내겠다는 승부욕이 아니라 공정함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이에요, 제가. 부모님은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계셔서 큰 딸인 저를 늘 믿어주시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구요. 어리고 젊었을 때엔 그저 내게 주어져 있는 일을 능력 닿는데까지 잘 해보자는 생각뿐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더 중장기적이고 담대한 꿈을 갖지 못하고 단기적인 목표 달성에만 무게를 뒀던 게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오세임 전무는 한국씨티은행에서 12년 넘게 일하다가 드레스드너 클라인워트 와서스타인(Dresdener Kleinnwort Wasserstein) 증권으로 자리를 옮겨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이사를 달았다. 앞서 얘기처럼 다들 말렸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인 이 곳에서 왜 떠나려 하느냐고.
“성과 평가도 좋았죠.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도전을 꿈꾸게 했어요. 이렇게 안정적으로 일하다가 적당히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옮긴 회사는 당시 한국에 첫 진출을 하던 때였기에 셋업 작업에 매진해야 했어요.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죠. 그래도 저는 10가지 기준이 있을 때 2가지 정도만 확실해도 도전해 보고, 저지르는 게 맞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편인데요, 모든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안전하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해 건너면 이미 도전은 물 건너가는 거든요”
또 선택하고 시작했으면 뭐든 열심히 하는 오세임 전무는 금세 몸무게가 5kg 이상 빠질 정도로 뛰었다. 회사는 2002년 아시아 시장 철수를 결정한다. 처음에 문을 여는 작업으로 회사에 들어왔는데 이번엔 문을 닫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오 전무는 그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했다. 회사는 철수 작업을 오 전무에게 맡겼다. 인력 정리부터 회사가 갖고 있는 골프장 헬스클럽 회원권 팔기까지 온갖 일들을 1년 간 했다. 증권거래소에 있던 회원증은 그냥 반납해도 될 것을 한국 진출을 원하는 한 홍콩 회사에 파는 수고를 자처했다.
새 일을 찾을 때 이미 문은 매우 좁아져 있었지만 마침 한국 공략을 계획하던 씨티은행 프라이빗뱅크(PB) 부문에 입사해 일하게 됐고, 이후 골드만삭스, 우리투자증권 등으로 자리를 옮겨 일했다. 우리투자증권에선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되어 최고정보책임자(CIO)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겸임했다. 그런데 회사를 나온 뒤엔 긍정론자도 흔들릴 만큼 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공기관 두 곳이 공개 채용을 해서 원서를 넣어봤는데 자신이 있었지만 다 떨어졌어요. 인상깊었던 도전이었죠. 예측이 어려운 시대구나. 그래서 저는 원칙을 정했어요. 넘어지고 엎어지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회복력과 인내심을 갖추자구요”
30년 직장생활을 했고 어떤 이라면 이제 쉬겠다고 결정했을 그 시기는 오 전무에겐 경력단절의 시기일 뿐이었다. 남편은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어주면서 운동을 권유했고 몸을 움직이면서 마음도 빨리 복원할 수 있었다. 여성인재아카데미 과정을 만드는데 참여해 외래교수가 되어 일했으며 싱가포르 OCBC 은행에서도 근무했다. 한국장학재단이나 차세대 여성리더를 키우기 위한 모임 윈(WIN) 등에서 멘토링 프로그램도 참여했다. 이 시기는 다음 도전을 위해 길을 모색하고 실력을 기를 절호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고. 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보고인베스트먼트에 합류했다.
워낙 다양한 분야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알고 싶은 욕심이 큰 오 전무는 독서량도 엄청나다. 최근엔 가족 독서 모임을 시작하기도 했다. 러시아계 미국 소설가 아인 랜드(Ayn Rand)의 소설 ‘아틀라스’ 주인공 존 골트의 좌우명이 감명깊었다고 한다.“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가 그것.
“저에게 있어 도전이란 잘 살아내는 것이에요. 혼란스러운 순간이 여전히 많죠. 그렇다고 제3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큰 도움이 되긴 어려워요. 스스로가 예측 불가능의 시대에 잘 맞춰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꿈을 작게 가져야 한다는 얘긴 아닙니다. 항상 다음(next)을 생각하세요. 남성 동료들을 돌아보면 아마 간부가 되고 임원이 되고, 이런 식으로 다음을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최고경영자(CEO)가 되려고도 할 거구요. 여성은 그런 습관이 잘 안 돼 있는 편이에요. 그리고 사람을 잘 관리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 전무의 다음 계획은 무얼까.
“저의 현재 도전 과제는 100세 시대, 변화의 시대에 잘 살아내는 것, 어른으로서 잘 살아내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가 말년에 가장 고민한 것이 ‘인간답게 산다는 건 뭘까’였다고 해요. 저도 여성으로서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가치, 인간이라면 해야만 할 것들을 고민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빈틈이 별로 없다. 인생의 마지막까지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나 듣는 이를 옥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후배들에게 도전을 부추긴다. 이런 리더십, 스며드는 멘토링은 곱씹어 볼 수록 배우고 싶고, 실천하고 싶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