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어느 마을 두 부자 이야기

입력 2016-12-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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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영하의 기온이지만 입고 있는 옷들이 따뜻해서 그런지, 예전 어린 시절만큼 춥지는 않다. 요즘 아이들은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린 시절 대관령 아래에서 살 때는 형제들 모두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서 세수를 했다.

집안에 세숫대야가 하나이다 보니 형제들 모두 내복 차림으로 차례로 줄을 서서 세수를 했다. 형이 세수를 마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목이 선듯하게 춥지만, 내 차례가 되어 세수를 하고 난 다음 문고리를 잡으면 손과 문고리가 자석처럼 쩍 달라붙는 날도 있었다.

아주 깊은 산촌에서 자라, 어린 시절 교회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번 단오 때 형들과 어른들을 따라 강릉 시내 구경을 하긴 했지만, 천변에 펼쳐진 단오장 구경에 바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지붕 꼭대기에 십자 철탑이 있는 교회 건물을 처음 본 것도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 같은 건 더더욱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것은 달력에 빨갛게 표시된 하루였던 것이다. 나뿐 아니라 형제들도, 동네 아이들 모두 그랬다. 그저 서양 전설의 한 대목처럼 산타클로스의 존재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날 서로 선물 같은 걸 나눈다는 것도 책에서만 보았지 현실에서는 그저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그 겨울 동안 산촌의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아무것도 나누지 않고 살았느냐면 그것은 또 아니다. 할아버지가 화롯가에 모여 앉은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어떤 마을에 두 부잣집이 살았다. 한 집 주인은 마음이 너그럽고, 또 한 집 주인은 욕심이 많고 성격도 사납다. 그렇지만 이들 두 부자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산다.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 모두 두 사람 앞에서는 좋은 얼굴로 좋은 말만 하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동네 인심 파악에 어두운 것이다.

그러면 이들에 대한 동네 인심은 언제 알 수가 있느냐? 그것은 추운 겨울, 눈이 내린 날 아침에 드러난다. 예부터 마을에서 행세를 하는 집안은 마을 한가운데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안으로 들어간 산 밑에 집을 지었다. 눈이 많이 오면 두 집 다 고립되고 말 것 같은데, 한 집으로 가는 길은 마을의 큰 길보다 먼저 눈이 치워진다.

눈이 오면 대갓집이 마을과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을의 어려운 집들이 대갓집으로 드나드는 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심 좋은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기들도 자주 다녀야 하니까 땅바닥의 흙이 드러나도록 눈을 말끔히 치우고, 인심 사나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 집 영감이 마을로 나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라고 길 위의 눈을 그냥 발로 꾹꾹 다져만 놓고 만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속엔 사람 사는 세상의 어떤 교훈이 들어 있었다. 한겨울도 그렇고, 이른 봄 춘궁기에 아침저녁으로 굴뚝에 연기를 올리지 못하는 집이 있으면 그건 가난한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사는 부자의 잘못이기도 하고 부끄러움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어린 손자들에게 들려주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과의 협력과 유대, 또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책임 이야기이기도 하다. 엊그제 청문회에 불려나온 재벌 총수들의 모습을 보는 내내 어린 시절에 들었던 그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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