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 무엇보다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된 것은 푸틴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이었다. 이번엔 이 문제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자 한다.
12월 15일 오후 5시께, 예정보다 3시간 가까이 늦게 푸틴은 러시아 특별기로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3시간이나 정상회담에 지각한 외국 정상은 일본으로선 처음이었다. 이 지각의 배경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정상회담을 러시아 측에서 주도하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시리아 정세가 복잡해 푸틴이 다른 나라의 정상들과 연락을 취하느라 늦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아베 총리가 일본 남쪽의 야마구치 현 나가토(長門) 시를 15일의 회담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아베 총리의 고향이자 유명한 온천지이기 때문이었다. 아베 총리는 고향으로 푸틴을 초대하여 온천 외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 러시아와의 현안을 푸는 데 유리한 고지를 마련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나가토 시의 오래된 온천호텔인 ‘오타니 산장’에 푸틴을 초대해 거기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오타니 산장은 매우 오래되었지만 최고급의 온천호텔이고 드물게 천체 망원경 시설이 있으며 노천탕이 유명한 곳이다. 이런 일본 측의 배려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감사의 마음을 여러 번 표명하기도 했다. 편한 분위기 속에서 두 정상은 95분간 통역만 배석시키고 현안에 대한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16일은 무대를 도쿄로 옮겨서 점심을 겸해 회담을 이어갔고 둘은 저녁 때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정상 회담은 총 6시간에 달했다. 그만큼 러·일 간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회담의 성과에 대해 공동성명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 기자회견이라는 형식을 취한 것도 두 나라의 입장 차이를 잘 대변했다. 16일 저녁 공동 기자회견은 아베 총리가 먼저 회담 성과를 설명하고 이어서 푸틴 대통령이 스피치를 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측에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남쿠릴열도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두 정상은 1945년 패전 전까지 남쿠릴열도에 살았지만 당시의 소련 침공으로 일본 본도로 쫓겨난 전 도민들이 앞으로 남쿠릴열도를 비자 없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을 위해 러·일 간에 특별법을 제정할 것이라고 아베 총리는 설명했으나 결국 러시아법을 중심으로 법안이 제정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럴 경우에는 남쿠릴열도가 러시아령이라는 것을 일본 자체가 인정하게 될 결과를 초래한다.
전 도민들이 남쿠릴열도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으로서는 결국 영토 문제는 러시아 측 주장을 받아들이게 될 우려가 있다. 이런 합의는 “전 도민들이 평균연령 81세 이상인 고령자들이라는 점을 고려해 개선이 필요하다”라는 데 아베 총리와 푸틴 대통령의 인식이 일치한 결과라고 설명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러·일 간 합의는 남쿠릴열도에서 러·일 공동경제활동을 추진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회담과 보조를 맞춰서 러·일 양국 정부는 에너지 분야 등 8개 항목의 경제협력 플랜에 관한 정부 간, 그리고 정부-민간 간 각서를 교환했다. 각서는 약 80개에 달했고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경제협력은 약 3000억 엔(약 3조 원) 규모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남쿠릴열도 문제를 비롯해 러·일 간 평화조약 체결 교섭에 대해 “2차 세계대전 이후 71년이 경과했지만 아직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는 평화조약이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에 우리 세대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번 회담을 통해 서로) 그런 강한 결의를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남쿠릴열도에서의 공동경제활동에 대해 “평화조약 체결을 향한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하면서 “남쿠릴열도 4개 섬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제도를 마련하는 협상을 러시아 측과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먼저 러·일 간의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의 경제협력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평화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러·일 간에 평화조약이 아직 없다는 사실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식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영토 문제 해결과 평화조약 체결에는 “러·일 간에 신뢰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고, 아직 시기상조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렇지만 아베 총리가 제안한 내용, 즉 남쿠릴열도의 전 도민인 일본인들이 4개 섬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방안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푸틴은 일본이 동북아에 있어서 러시아의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하면서 아베 총리가 내년 편한 시기에 러시아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푸틴은 남쿠릴열도의 영토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확실한 얘기를 피했다. 러시아의 기본적인 입장은 ‘남쿠릴열도에는 영토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 남쿠릴열도 에토로후 섬의 전 도민인 스즈키 사키코 씨(78)는 일본 국영방송 NHK와의 인터뷰에서 “영토 문제에 구체적인 진전이 없었다는 점은 실망스럽습니다. 다만 원래의 도민들이 4개 섬에 가기 쉬워질 것이라는 발표가 기뻤고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러·일 관계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느꼈으니, 앞으로 멈추지 않고 더욱 진전됐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이처럼 전 도민들은 대체적으로 남쿠릴열도 반환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는 점을 아쉽게 생각했지만 4개 섬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된다는 소식에 대해서는 평가했다.
한편 제1 야당인 민진당의 렌호 대표는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라는 진전이 있었지만 영토 문제가 무시된 인상을 떨치지 못한다. 정말로 평등한 관계로서의 협상이었는지 의문이다. 무승부였다기보다 푸틴 대통령이 한판으로 이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 유감스럽다”라고 논평했다. 기타 공산당과 사민당 등 야당들도 민진당과 비슷한 논평을 내놓았고 자민당과 연립을 구축하는 공명당과 야당 중 보수세력인 일본유신회는 회담의 성과를 평가했다.
이번 러·일 정상 회담의 결과는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의 말이 그 본질을 대변했다. 니카이 씨는 자민당 본부에서 기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 측으로서는 영토 문제를 해결해 평화조약을 조기에 체결하는 것이 과제다. 경제 문제도 중요하지만 인간은 경제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좀더 진지하게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줘야 한다’라고 러시아 측에 날카롭게 파고들어야 했다. 국민 대부분은 이번 결과에 실망했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깊이 알게 된 것은 앞으로의 참고가 될 것이니 이어서 이쪽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성과를 기회로 삼아 열심히 추격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간사장이란 당 대표에 해당한다. 여당 자민당의 당 대표가 이렇게 총리의 행보를 비판적으로 논평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만 니카이 씨는 가끔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민당 내의 외교 자세를 비판해 온 인물이므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의 3대 영토 문제란 러시아와의 남쿠릴열도 문제, 중국·대만과의 센카쿠열도 문제, 그리고 한국과의 독도 문제다. 이 중 일본 입장에서는 남쿠릴열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두 지역과 달리 남쿠릴열도에는 원래 살고 있었던 일본인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아직 생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한을 풀어야 하는 숙제가 일본 정부에 있으므로 아베 총리로서는 전 도민이 남쿠릴열도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하는 데 합의한 것이 성과라고 앞으로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남쿠릴열도가 일본으로 반환되어야 한다.
푸틴 대통령은 스포츠 중 유도를 좋아하고, 유도 스승이 일본인이기도 하며, 그의 두 딸은 모두 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공부했다. 푸틴은 그 정도로 일본통이다. 그러므로 아베 총리는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있을 때 남쿠릴열도 문제를 해결하고 러·일 평화조약을 체결하려고 그동안 최선의 노력을 해 왔다. 이번 합의가 앞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그 결과 러·일 관계가 진전될지 후퇴할지를 한국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