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성은 평북 의주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총애를 받았지만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조부 손에 자랐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자녀 없이 22세에 아편 중독으로 남편도 죽었다. 서울로 온 그는 상동교회에 다니며 이화에서 공부했다. 이후 소학교 교사, 이화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
차미리사와 교류하며 이준과 함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였으나 병으로 중퇴한 뒤 부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은 그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조신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래를 불러 유행시켰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양의 진명여학교를 맡아 민족교육에 전념하였으나 3·1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사임하였다. 이후 중국을 넘나들며 상하이 임시정부의 항일 운동가들을 도왔다.
1920년 김봉규·안국정 등 청년들과 함께 평남 맹산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당시 단원이 수십 명에 달하였으며 맹산·영원·덕천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60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아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의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치안유지 방해죄로 6개월간 수감 중이던 1920년 11월 다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 교육·운동가를 돌보기 위해 고학원을 세우고 수양관도 지었다.
1928년 1월 근우회(槿友會)의 평양지회를 조직하고 평양근우회 회관도 짓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 1930년에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여성실업장려회를 조직하여 여성의 경제적 각성과 취업 확대에도 힘썼다. 1934년 9월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그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