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보험산업이 대한민국만큼 발전해 있다면 지금 제 인생은 크게 달라져 있을 거에요. 남과 북이 통일이 된다면 북쪽 사람들에게 보험의 중요성을 알리는 보험 전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LIG손해보험 구미지점에서 영업설계사로 일하는 이광철 씨는 소위 말하는 새터민(탈북자)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10월 초에 열렸던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소감을 밝히며, 이 씨는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보험에 대한 애정을 함께 드러냈다. 이 씨의 대리점 명이 ‘통일’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씨는 1971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자랐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네 누나와 함께 어렵사리 살았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이 씨가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가세가 펴는 듯 했다.
그런 이 씨가 불현듯 탈북을 결심한 건 지난 2003년 3월, 간경화로 고생하던 어머니의 약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 국경을 넘다 북한 당국에 적발돼 3개월간 혹독한 시련을 겪은 후였다.
“탄광에서의 고된 노동도, 북한 정부의 감시도 참을 수 있었지만, 그 사이 전해들은 어머님의 사망 소식과 가족의 미래였던 의과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도저히 희망을 되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2003년 중국국경을 넘은 이 씨는 2004년 7월 베트남을 경유해 남한 땅을 밟았다.
하지만 자신의 지난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집 근처 성당을 다니는 것이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죠” 하지만 그런 그에게 점차 많은 이웃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고, 선뜻 양어머니가 돼 준 이정수 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불안감은 어느덧 사그라지고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5월, LIG손해보험에 다니던 지인의 소개를 받고 보험 설계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한에도 민영보험이 발달해 있었다면 어머님의 병을 치료할 수도 있었을 테고, 제가 어머님의 약과 음식을 얻기 위해 중국국경을 넘나들 필요도 없었겠죠. 보험은 공부하면 할수록 매력적입니다. 작은 보험료로 딱 필요한 순간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 씨가 보험업에 뛰어든 이유다.
현재 북한에는 조선국제보험회사(KFIC), 조선민족보험총회사(KNIC) 등의 보험사가 있지만 모두 국영 독점 운영되며 기업과 국민의 재산보호 보다는 인민 소유의 국가재산 보호가 주목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씨 역시 보험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정도로 보험에는 문외한이었다.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그랬지만 통 들어본 적 없는 외래어와 외국어들은 그를 더 힘들게 했다.
갖은 노력 끝에 보험자격증을 획득하고 기뻐한 것도 잠시, 막상 영업을 시작하고 나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난관들이 이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 땅에 헤딩이란 비유가 제격일 거에요. “저를 만난 고객들은 제가 새터민이라는 사실에만 호기심을 가질 뿐, 결정적 순간에는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통해 보험에 가입하더군요”
하지만 보험 영업에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쌓은 지금의 이 씨는 결코 계약 체결 전까지 자신이 새터민임을 밝히지 않는단다.
믿음이 아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보험 영업에서는 부정적으로 작용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이광철 설계사의 신규매출은 약 1300만원, 월 평균 수입은 150만원 안팎 정도다.
LIG손해보험 이화성 구미지점장은 “이 씨의 매출과 소득이 아직 동료 설계사들에 비해 모자란 편이긴 하지만, 보험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누구 못지 않아, 주위 동료들이 그의 각오와 성실함에 탄복할 때가 많다”며 “멀지 않아 골드멤버(보험왕)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새터민인 제가 이렇게 좋은 직장을 갖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건 LIG손해보험 동료들의 아낌 없는 도움과 이웃의 따듯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회구제적 성격으로 보자면 보험이 바로 이런 이웃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평생 업으로 삼을 보험을 북한에 전파하고 싶다는 새터민 이광철 씨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