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격랑에 휩쓸린 지 1년여 지난 1974년 8월 15일, 제29주년 광복절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1917.11.14~1979.10.26)이 경축사를 낭독하는 순간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대통령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피했지만 귀빈석에 있던 영부인 육영수(1925.11.29~1974.8.15) 여사는 머리에 총탄을 맞고 긴급 후송돼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사망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박정희는 다시 연단에 섰고, 나머지 연설문을 다 읽은 뒤 손을 흔들며 무대를 내려갔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문세광(1951.12.26~1974.12.20)의 일본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로, 고교 2학년 때 중퇴했다. 재학 당시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학급위원, 부회장 등 과외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학원분규나 정치활동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구출대책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조사당국은 문세광의 배후로 조총련과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을 지목했고, 특히 북한 김일성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담당 검사였던 김기춘(1939.11.25~)은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해 범행 과정 일체를 자백받는 등 수사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그해 서강대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 갔던 박근혜(1952.2.2~)는 어머니가 사망하자 귀국해 1979년까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구국봉사단(후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을 조직한 최태민과 함께 국민정신 개조운동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문세광은 내란 목적 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돼 대법원 사형선고 3일 뒤인 12월 20일 사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