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은 마지막 당부를 아들에게 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남긴 중국 돈 248원은 그의 원대로 1946년 31혁명 기념식에서 김구에게 전해졌다. 그의 애국애족의 아름다운 유언이 지켜진 셈이다.
1872년 12월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인격을 닦았다. 열아홉에 혼인한 남편 김영주가 1895년 을미 항일의병에 나가 전사한 뒤 10여 년간 3대 독자인 유복자를 돌보고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상경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구국에 헌신하기로 작심하였다.
만주 요녕성 통화현으로 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농촌에 10여 개의 교회와 2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청년과 여성들에게 민족애와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1922년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금하고,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남성 못지않은 항일 투쟁을 감행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안창호, 김동삼 등 투옥된 혁명가들에 대한 구명운동과 옥바라지에도 정성을 다했다. 또 어머니의 마음으로 병들고 상처받은 젊은이들을 돌봤다.
1932년 하얼빈에 온 국제연맹조사단에 일제 만행을 고발, 나라 잃은 백성의 뜻을 알리겠다는 간절함으로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조선독립원’이라 혈서를 쓰고 손가락과 같이 흰 수건에 싸서 전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이 일은 실패했다. 그러자 1933년 3월 1일 일제의 만주국 건국행사장에서 육군대장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고자 거지 할머니로 변장, 권총을 품에 숨긴 채 창춘(長春)으로 가다 일경에 잡히고 말았다. 모진 고문에 보름간 단식하며 옥중에서 투쟁하다, 병보석으로 나와 조선인 여관에서 “독립은 정신에 있다” 한마디 유언으로 순국했다.
30년간 만주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 자신을 바친 남자현이 순국하자 일제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하루 만에 남강외인 묘지에 묻힌 그에게 훗날 하얼빈 조선인 동지들이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비석을 세워 기렸다. 현재 그곳은 사라지고 국립묘지에 가묘만 남아 있다. 1962년 건국훈장인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