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망년지교를 꿈꾸는 송년회

입력 2016-12-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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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이 달랑 이틀 남았다. 돌이켜 보니 한 해 동안 귀한 인연을 여럿 만났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음이 통하여 자신를 알아주는 벗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난초처럼 향기로운 사귐인 ‘지란지교(芝蘭之交)’, 맑은 물처럼 담박한 친구인 담수지교(淡水之交), 목숨을 나눌 만큼의 사이인 ‘문경지교(刎頸之交)’, 나이와 무관한 벗인 ‘망년지교(忘年之交)’ 등 참된 우정을 뜻하는 말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특히 망년지교, 망년지우(忘年之友)는 너무나도 고상한 우정이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나이를 떠나 허물없이 사귄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상서로운 만남인가. 보통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제안해 관계가 이뤄진다는데, 학문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이들과 나이를 잊은 우정을 나누고 싶다.

그런데 망년이 일본과 연결되면서 의미가 심하게 오염됐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섣달그믐께 친지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흥청대는 세시풍속이 있었다. 이를 ‘망년(忘年)’ ‘연망(年忘)’이라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마치 우리 풍속인 듯 뿌리를 내렸다. 일본말 ‘보우넨카이(ぼうねんかい·忘年會)’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망년회는 ‘한 해를 잊는 모임’이다. 국어사전에도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베푸는 모임’으로 올라 있지만, 국립국어원은 ‘송년모임’, ‘송년회’라는 순화어를 제시했다. 그저 먹고 마시며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게 우리 정서와 맞지 않아서다.

송년회(送年會)는 차분하게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준비하는 자리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에서 따온 말이다. 요즘엔 순우리말인 ‘설아래 모임’, ‘설밑 모임’, ‘세밑 모임’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다.

‘설밑’, ‘세밑’은 한 해의 밑, 즉 한 해가 끝날 무렵을 뜻한다. 해가 저문다는 뜻의 ‘세모(歲暮)’ 역시 한 해가 끝나는 시기나 설을 앞둔 섣달그믐(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눈썹 세는 날)을 일컫는다. 그런데 세모는 일본식 한자이므로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구랍(舊臘)은 언제일까? 구랍의 ‘구(舊)’는 지나다, 오래다의 뜻이고, ‘랍(臘)’은 섣달(음력으로 한 해의 맨 끝 달)을 의미한다. 즉 구랍은 음력으로 지난해 12월로, 음력 1월 1일인 설날이 지나야만 쓸 수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양력 기준으로 지난해 12월을 ‘구랍’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이다. 양력 1월에 전달을 칭할 때는 ‘구랍’이 아니라 ‘지난해 12월’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송년회에서 과음해 고생하는 이들(물론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이 많다. ‘부어라 마셔라’, ‘열심히 일한 당신, 오늘은 죽자’ 식의 그릇된 음주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송년회에서 마시는 술은 각별하다. 묵은해의 감정 찌꺼기를 버리고 새해의 각오를 담아 마시는 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즐거운 분위기에서 적당히 마셔야 한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제롬 K. 제롬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지만 자신들의 건강을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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