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정치경제학] ‘트럼프 발작’에 곪은 상처 터져...외환위기 처한 아시아

입력 2017-01-0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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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도·터키·말레이시아·태국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면서 신흥국들이 새로운 외환위기 불안에 휩싸이고 있다.

트럼프가 공격적인 재정확대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기대에 달러화에 매수세가 몰리면서 신흥국 통화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달러화당 중국 위안화 가치는 지난해 약 6% 떨어져 연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폭의 하락세를 나타냈다. 인도 루피화와 터키 리라화 가치는 달러화에 대해 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지난해 12월 1998년 1월 이후 최저치를 찍었다.

또 미국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신흥국 국채에도 매도세가 대거 유입됐다. 지난 2013년 5월 벤 버냉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양적완화 축소를 언급하면서 ‘테이퍼 탠트럼(Taper Tantrum·긴축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지난해 말 신흥시장이 ‘트럼프 탠트럼(Trump Tantrum·트럼프 발작)’에 휩싸인 것이다.

씨티그룹은 지난해 11월 보고서에서 “트럼프 정부의 재정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 미국 금리가 올라 신흥국 자산 매력이 더 떨어진다”며 “보호무역주의적인 자세도 신흥국 외국인직접투자(FDI)에 타격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변수 이외에도 신흥국 각국이 직면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외환위기 불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중국은 대만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트럼프가 뒤흔들면서 정치적 불안정성이 경제와 환율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달 11일(현지시간)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무역을 포함한 여러 이슈들을 중국과 협상하면서 왜 ‘하나의 중국’ 원칙에 구속받는 지 이해할 수 없다”며 중국에 가장 민감한 정치 이슈를 협상 카드로 삼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켄 펑 씨티그룹 글로벌마켓아시아 투자전략가는 “트럼프가 미·중 무역정책을 촉발해 위안화 가치 하락 압력을 더할 수 있다”며 “중국이 불가피하게 금리를 올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터키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해 7월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고 나서 국가비상사태 선포,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의 개헌 추진 등 권력 강화에 나서면서 정정이 불안정한 상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달러화당 터키 리라화 가치가 미국 대선 이후 한 달 간 9% 하락해 멕시코 페소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하락세를 나타냈다며 에르도안의 권위주의가 강해지는 가운데 테러와 쿠데타 등 정치적 충격이 계속되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인도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검은돈 근절을 목적으로 지난해 11월 500루피와 1000루피 등 고액권 유통을 하루 아침에 중단시키는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나서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도 나집 라작 총리가 연루된 국부펀드 1MDB 비자금 스캔들로 연일 총리 퇴진 시위가 벌어지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1997년 7월 바트화 폭락으로 아시아 외환위기 시발점이 됐던 태국은 현재 정치상황이 불안정해 새 위기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살아있는 신’으로 국민의 추앙을 받았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지난해 사망해 마하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라마 10세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런 가운데 올해 총선이 예정돼 있으나 뿌라윗 왕수완 태국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지난해 11월 “총선은 2017년에 치러지나 새 투표 시스템 도입으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해 군사정권에서 민정으로의 이양이 2018년으로 미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총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이 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태국은 지난해 8월 군부의 정치개입을 허용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됐다.

정치적 불안정이 통화 가치 급락과 경기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악몽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스티븐 해거드 샌디에이고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는 지난 2000년 저서 ‘아시아 외환위기의 정치경제학’에서 아시아 각국은 고성장 시기 누적됐던 정치적인 모순이 외환위기를 촉발하고 더욱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정경유착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금융충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정치적 불확실성이 아시아 외환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종종 정책입안자들이 이를 간과했다고 꼬집었다.

특히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인도네시아는 정정 불안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과중됐다는 평가다. 당시 루피아화 가치 폭락에 생필품 품귀 현상마저 겹쳐 국민의 불만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듯이 커졌다.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에 불만의 화살이 향하면서 1998년 5월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대규모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이 여파로 32년간 장기 집권했던 수하르토 당시 대통령이 측근인 바하루딘 유숩 하비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전문가들은 더 거슬러 올라가 1990년 독일 통일이라는 정치적 이벤트가 아시아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다고 분석했다. 당시 통일독일은 경제 부흥과 통일 비용 마련을 위해 마르크화를 대량으로 풀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당시 유럽환율메커니즘(ERM) 가입국도 그 여파에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불황에 시달리던 영국은 더 큰 타격을 받아 2년 뒤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는 검은 수요일을 겪었다. 이런 침체 분위기가 수년간 이어지다가 경제구조가 취약한 아시아 각국을 강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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