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오바마는 러시아의 해킹과 그간 러시아가 미국에 취해온 전반적 행태의 대응 차원에서 러시아 정보기관과 관계자에 대한 제재와 함께 35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였다. 뉴욕과 워싱턴 인근에 있는 러시아 공관의 휴양 시설도 정보활동 혐의로 폐쇄했다. 오바마는 대응 조치 중 일부는 비공개라고 하였는데, 이는 푸틴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퇴임을 수주 남겨놓은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으나, 오바마는 미국 민주제도의 근간인 선거에 개입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오바마는 러시아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트럼프를 겨냥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모든 미국인은 러시아의 행위에 경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트럼프는 이제 더 크고 좋은 사안으로 넘어갈 때라고 하면서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보기관장을 만나겠다고 하였다. 비등하는 여론 앞에서 러시아의 해킹을 믿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견지하기 어려움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공화당 지도부는 늦었지만 적절한 조치라며 트럼프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반응이었다. 당초 러시아 외교부는 종래 하던 대로 상호주의에 따른 맞대응을 추진하는 듯했다. 그런데 최종 결정이 발표되기 전에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미국 외교관 35명의 추방을 푸틴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고 공개 언급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사안은 러시아 정부의 최종 결정으로 발표되며, 이처럼 외무장관이 여차여차한 내용을 건의하였다고 중도에 언급하는 일은 드물다. 마치 극적인 다른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 복선을 까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푸틴은 미국 외교관들을 추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발표하여 극적 반전을 과시하였다. 푸틴은 오바마의 결정은 러·미 관계를 악화시키고 손상하기 위한 도발이라고 하면서도 맞대응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관대함을 보이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하였다. 물론 그는 러시아가 미국의 제재에 대응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푸틴으로서는 떠나가는 오바마 행정부와 티격태격하기보다 들어오는 트럼프 행정부를 향하여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그럼으로써 트럼프의 운신을 편하게 해주고자 한 것이다. 트럼프도 이러한 푸틴의 대처를 높이 평가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향후 미·러 관계에 대한 기대치를 높일 만해 보였다.
푸틴의 이러한 대응은 통상적인 것은 아니나 러시아 식 행태상 전혀 예상 밖의 일은 아니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 ‘마지막 한 발’에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자 명사수인 실비오는 어느 백작과의 결투 국면에서 먼저 쏜 상대의 총탄이 자신을 비껴간 후, 자신이 쏠 차례가 되자 상대를 겨냥한다. 이제 백작의 목숨은 실비오의 손가락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백작이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실비오는 지금은 총 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후 결투 현장을 떠난다. 그 후 수년 동안 유보한 마지막 한 발을 쏘기 위해 때를 기다리며 준비한다.
그런데 미국 내에서 트럼프 진영의 분위기는 트럼프가 정보기관장의 보고를 받으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그 후 트럼프는 러시아의 해킹 행위를 인정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다만 그는 해킹이 대선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미 정보기관이 트럼프에게 제출한 보고 내용이 공표되었다. 푸틴의 지시에 의해 해킹이 이루어졌고 러시아 정보당국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으며 트럼프의 사생활이나 사업 관련 정보도 러시아 측에 의해 활용될 소지도 있다는 것들이었다. 미국 언론들은 러시아의 적나라한 행각이 드러났다고 평가하였다.
물론 러시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러시아 언론과 여론은 “그동안 빈번하게 나오던 이야기로, 새로운 것이 없으며 증거도 없다”고 하였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개입설을 부인하고 미국 내 해킹 논란은 선거에 진 쪽이 핑계를 찾는 차원이며 어떤 경로로 유출되었느냐보다 유출된 내용이 사실이냐 여부가 중요하다는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러시아 여론 중에는 만일 그러한 해킹을 러시아 민간이 했다 하더라도 그간 서방 언론이 러시아에 대해 거의 정보 전쟁 수준으로 매도해왔던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도 있다.
이런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은 새해 들어 추가 조치를 취하였다. 러시아 고위 수사 관계자와 여타 인사를 인권 탄압과 관련하여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였는데, 그중에는 안드레이 루고보이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2006년 런던에서 의문사한 반(反)푸틴 인사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암살범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지목된 바 있다. 루고보이는 현직 의원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한 일련의 조치는 그 자체로 러시아의 해킹, 인권 탄압, 미 외교관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여 취해진 것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트럼프가 취임한 후의 대러 정책에서 취할 수 있는 정책에 제약을 가하려는 측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러면 정작 트럼프가 취임한 후 미·러 관계는 어찌될 것인가.
물론 아직 판단하기 이르고 지금까지 나온 근거들은 단편적인 조각들일 뿐이므로 자료가 충분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조각들이 보여주는 추이는 있다. 무엇보다도 해킹 등 러시아 관련 사안에 대한 트럼프의 언술에 조금씩 주류 여론이 반영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해킹을 부인하였다가 더 좋은 사안으로 넘어갈 때라고 하였고, 정보기관을 불신하였다가 정보 보고를 받겠다고 하였고, 받은 후에는 해킹을 시인하였다. 또한 최근 진행된 국무장관 지명자 청문회에서 렉스 틸러슨 지명자도 상당히 강한 대러 정책 시각을 피력하고 있고, 러시아에 대한 기존 워싱턴 정가의 견해들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트럼프 정부가 나아갈 방향이 이쪽이라면 미·러 관계에 대한 기대치는 좀 보수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 방향은 러시아가 호응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대응 카드를 만지작거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미국 측에서 시의적절하게 러시아 쪽의 인식과 움직임을 포착하여 세심하게 대처해 나가는 노력을 보인다면 좋겠지만, 역사적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게 되리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과거 탈냉전 초기 러시아가 국내적 혼란 속에서 미국과의 협조하에 대외 관계를 풀어가고자 하였을 때 미국은 낙관론과 자기중심적 사고에 따라 러시아에 대해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바마가 제안했던 대러 리셋 정책도 러시아 측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미·러 모두 강대국으로서 자기중심적 성향이 있다는 점이 제약 요인의 하나였다.
푸시킨 소설의 주인공 실비오는 백작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때, 마지막 한 발을 쏘기 위해 찾아간다. 다시 결투가 이어진다. 그런데 실비오는 마지막 한 발을 백작 뒤에 걸려 있는 그림을 향해 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 세계의 미·러 관계도 그럴지는 두고볼 일이다. 현실은 소설보다 엄혹하므로 푸틴이 두 번씩 실비오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