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으로 풀어놓았다 해도 그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좀 난해한 가사다. 강원도 태백, 정선, 평창, 영월 지역은 숲이 울창하여 예로부터 소나무를 벌목해 그 재목을 수도권에 공급했다. 농한기인 겨울이나 봄에 벌목하고 한강의 수위가 올라가는 여름에 목재를 뗏목으로 만들어 남한강 물길을 이용해 서울까지 운송했던 것이다. 이때 뗏목을 운송하는 사람을 ‘떼꾼’, 뗏목을 해체하여 목재로 팔고 받은 돈을 ‘떼돈’이라고 했다.
황새여울과 된꼬까리는 각각 평창군 미탄면과 영월 거운리의 급류지역이다. 뗏목이 고꾸라질 정도로 물살이 거칠어 된꼬까리라 불렀다 한다. 이 지역을 벗어나면 뗏목은 물이 가득하고 물살이 죽는 만지(滿池)에 이른다. 이곳에서 떼꾼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요기도 하고 막걸리도 한잔했다. 당연히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고, 그 주막 여주인이 바로 전산옥(全山玉, 1909~1987)이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바로는, 전산옥은 젊었을 때 미모가 뛰어났고, 노래 또한 일품이었다. 그러니 생명을 걸고 여울을 통과한 떼꾼들의 마음을 홀릴 만도 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 팔당댐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이런 떼꾼들의 활약으로 강원도의 목재는 서울로 꾸준히 운송됐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뗏목 수송이 이뤄졌을까?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부터 강원도의 목재는 뗏목 형태로 수송됐다. 1395년(태조 4년) 4월 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교주도(交州道) 작목별감(斫木別監) 노상(盧湘)이 “벌채해 놓은 재목 1만여 개를 지금 곧 운반하려면 그 폐단이 매우 클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비 온 뒤에 뗏목을 만들어서 강으로 내려오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는 보고를 임금에게 올린다. 재목 1만 개라면 엄청난 양이다.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1395년부터 본격적인 신도시를 건설했으니 당시 가장 중요한 건축재인 목재가 대대적으로 필요했음은 불문가지. 이에 강원도의 목재가 대량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한양 건설의 총 책임자는 조선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강원도의 목재를 비롯해 팔도의 온갖 물자와 인력을 동원, 1398년 봄에 수도 건설을 일단락한다. 약 3년 만에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관청 등을 완성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를 기념하고자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짓는데, 이 팔경시에는 도성, 궁궐, 관공서, 여염집에 대한 찬사가 들어 있다. 한양 건설은 조선의 건국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사업이었던 만큼, 건설 후에는 그만큼의 자부심도 따랐던 것이다. 정도전의 경쟁자였던 태종 이방원도 한양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태종 11년인 1411년에는 “성 안에 장랑(長廊)을 지으라고 명하고, 강원도 군정(軍丁) 1만3000명을 동원해 재목을 베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1414년에도 태종은 도성에 좌우 행랑을 지을 것을 명한다. “종루(鐘樓)에서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종묘 앞 누문(樓門)에서 동대문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行廊)을 짓고자 한다. 내가 이미 백성에게 원망을 들었으니, 오히려 조성(造成)하기를 끝마쳐서 자손을 연익(燕翼)하겠다. 마땅히 충청도ㆍ강원도 양도의 연례로 작취(斫取)하는 재목을 가지고 짓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현재의 종각에서 남대문까지, 종로 4가에서 동대문까지 긴 화랑을 지었던 것인데, 이는 요즘으로 치면 백성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업시설이 완성되자 태종은 병조(兵曹)의 건의에 따라 1417년에 군영을 짓는다. 병조에서는 “각도의 번상(番上)하는 시위군영(侍衛軍營)을 쓸모없는 재목으로 임시로 지었기 때문에 여러 해가 되면 모두 퇴락하여, 심한 추위와 장맛비에 간고(艱苦)하기가 더욱 심합니다. 마땅히 오는 봄에 고쳐 지어야 하겠으니 빌건대, 강원도 및 충청도 시위 군인을 시켜 나무를 베어 냇물에 띄워 보내게 하소서”라고 건의한다. 이에 태종은 “이것은 장구한 계획이다”라고 하며 군영을 짓게 한다.
조선 개국 후 약 30년 동안 강원도 재목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관수용에만 그친 게 아니고 민간에서도 강원도의 목재로 집을 지었다. 이 때문에 강원도 목재가 부족해지자 조정에서는 강원도 목재로 민간 집을 짓지 못하게 했지만, 이는 백성의 원성을 불러일으켰다. 1427년 세종은 서울에 사는 백성이 강원도의 목재로 집을 지어도 좋다는 하교를 내리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이기도 하지만 배를 만드는 조선재(造船材)이기도 하다. 1474년 성종 때는 대사헌 이서장(李恕長) 등이 상소하는데, 그 내용 중에 “예로부터 강원도 1도가 재목의 연수(淵藪)라고 일컬어 오는데, 이제 또한 다 없어져 간다고 하니, 만약 금제(禁制)하지 아니하면 수년 뒤에는 반드시 배 만들기에 알맞은 재목도 없어질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1525년의 기록에도 “강원도는 명산(名山)이 많기로 이름난 곳인데, 벌채가 잇달아 해변(海邊)의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돼버렸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건축재로, 조선재로 강원도의 소나무는 점점 고갈되어 갔고, 이를 베고 운송하던 강원도 백성의 고통도 점차 깊어 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또 한 번의 대대적인 벌목이 행해진다. 한성의 여러 궁궐이 불타고 기반 시설이 파괴돼 건축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종묘궁궐영조도감(宗廟宮闕營造都監)을 설치해서 불탄 왕조의 기반 시설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당시 동부승지 박동열(朴東說)은 1607년 강원도 여러 고을의 인력으로는 벌채와 운반이 어려우므로 영남 지방의 인력을 동원해 부역할 것을 건의하고, 이는 받아들여진다. 강원도의 인력으로는 한계에 봉착했던 것이다. 1610년 사헌부 집의 이호신(李好信)은 경연에서 광해군에게, “지난번 대간이 건축하는 것을 중지하자고 청했는데, 상께서 긴요한 곳은 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강원도가 벌목과 재목 수송에 고달퍼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도망했으므로 그 궁핍한 상황은 참혹해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 궁궐 재목 외에 왕자의 길례(吉禮) 치를 집을 수리할 재목은 별도로 정했으나 강물이 불어나지 않아 수송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 지방 백성은 독촉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전답을 팔아 면포를 사가지고 와 경강(京江)에서 무역을 하니, 재목 하나의 값은 그 비용이 갑절이나 됩니다. 애처로운 우리 쇠잔한 백성이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절반을 삭감해 적은 은혜라도 입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전란의 피해에 벌목과 수송의 부역이 따르니,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도망했다’는 것인데 당시 강원도 영서 지방 백성의 참혹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농사지을 땅도 부족하고, 그 땅조차 밭이 대부분이어서 메밀, 수수, 조 등의 농사를 지어 연명했던 강원 영서 지방 백성에게, 목재의 국가적 수요로 인한 부역마저 더해지니 이곳 백성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대는 좀 앞서지만 고려 공민왕 때의 관리 허소유(許少由)는 정선 땅을 지나면서 “땅은 메마르고 세금은 무거우니 유망(流亡)한 백성들이 많아/집집마다 석청(石淸) 뽑아 바치는 일 차마 어이 보랴”라고 노래했다.
지금이야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공기를 뽐내지만 과거 정선, 평창, 영월 등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척박한 농사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벌목과 수송 등에 따른 부역 등으로 말미암아 매우 곤고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삶의 회한과 질곡에서 정선 아리랑과 같은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가 탄생했을 것이다. 경복궁의 기둥에도, 남대문의 대들보에도 수많은 백성의 한 맺힌 아리랑 곡조가 들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