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나온 책 이름이지. 일본 사람 둘이 쓴 거잖아. 한 명은 철학자, 한 명은 저술가. 우리나라에서만 100만 부쯤 팔렸다던데, 작년에는 2부도 나왔지. 그런데 왜?”
읽어봤어?
“아니. 제목만 봐도 내용이 짐작되는데 굳이 읽어봐야 하나?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소리 들으려 하지 마라. 남의 눈치 보지 마라. 그게 행복의 열쇠다.’ 이런 내용일걸. 그런 가르침 평생 받아왔는데 돈 들여, 시간 바쳐 책까지 사서 읽을 건 없지. 너도 그런 책 안 읽을 사람인데, 왜 묻냐?”
대선주자들 전부 그 책 읽어본 것 같지 않아? 모두 미움 받을 용기가 충만하니까 말이야. 대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사람들 어느 누구든 ‘경쟁자보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 더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그 사람들 뜻을 못 이뤄도 남들보다 오래 살 거야.
“그게 그 책 때문이냐? 그전부터 한국 정치인들은 욕 먹어왔어.”
‘미움 받을 용기’ 때문이건 아니건 사회 전체적으로 ‘미움의 총량’, ‘증오의 합’이 늘어난 건 맞아. ‘미움 받을 용기’를 갖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증가한 만큼 ‘미워할 용기’로 자신을 무장한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아.
“또 말장난! 쓸 게 없어서 언설(言說)로만 칼럼 한 편을 만들겠다는 거구나? 칼럼에 쓸 만큼 사실(事實)을 못 모았구나?”
그렇게 생각해도 할 수 없지. 그런데 정말 요즘 미움과 증오가 넘치지 않냐? 누가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헐뜯고 무시하며 침을 뱉고 나서잖아. 그 사람 배우자와 아들, 딸, 직장과 소속된 단체에도 온갖 비난이 쏟아지지.
“그게 왜 ‘미움 받을 용기’ 때문이냐? ‘미움 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지.”
아니지. 미움 받을 짓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전에는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언사(言辭)가 넘치지는 않았어. 페이스북 한번 봐봐. 욕과 저주가 가득한 댓글이 얼마나 많아. 글쓴이를 사람 취급 안 하는 댓글도 덕지덕지 붙어 있지. 신문, 방송 보도에도 마찬가지이고.
“싫으면 싫다, 미우면 밉다고 하는 게 뭐 어때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가 이런 말을 했어. 인도 철학자이지. “사랑하는 에너지나 미워하는 에너지는 다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렇다면 에너지를 사랑에 쏟는 게 좋지 않은가”라고 말이야. 지금 우리나라가 위중한 상태라며?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으로 뭉쳐야 하지 않아? 사랑으로 뭉쳐서 난국을 돌파해야 할 판에 미움과 증오만 주고받으면 뭐가 남아? 난국 돌파가 아니라 파국 돌입 아니냐?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곳에 집중해야 할 우리의 에너지가 남을 나무라고 헐뜯는 데 사용되는 게 안타깝다는 말이야. 비난과 비방이 앙칼지고 매몰찰수록 시원하다며, 사이다 같다며 손뼉 치고 발 구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들지.
“시원한 것을 사이다에 비유하는 건 나도 별로야. 사이다나 콜라 따위 청량(淸凉)음료는 마실 때만 청량할 뿐, 마시고 나면 금세 찝찝해지지. 손에 묻으면 끈적거리고. 그래서 물로 다시 입을 헹구기도 하잖아. 달짝지근한 걸 좋아하는 세태 때문인데, 단것 좋아하면 이 썩어요.”
나중에 이가 썩을망정 우선은 단 게 좋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사이다와 관련해서 이런 게 있더라고. 1950년대 미국 코미디 영화 대사인데, “너 사이다 달라고 했냐? 이리 와, 네 목의 사과에서 사이다를 짜주겠어!”라는 거야. 사이다는 원래 사과로 만들지. 그런데 남자들 목 앞에 툭 튀어나온 거, 목울대 말이야, 이게 영어로 ‘아담의 사과(Adam’s Apple)’잖아. 자꾸 시원한 사이다 달라고 보채면 그걸 짜서 사이다를 만들어주겠다고 한 거야. 이 말이 “또 시원한 말 해달라고? 이리 와, 이젠 네 목울대에서 시원한 말을 짜주겠어!”라고 들린단 말이야.
“별 희한한 연상을 다 하는군. 아까 사랑으로 뭉쳐야 한다고 했지? 그런데 러시아 소설가 안톤 체호프는 ‘사람들은 사랑과 우정, 존경심보다는 증오로 더 잘 뭉친다’고 했어. 맞는 말 아닌가? ‘남 잘되는 꼴 못 보겠다’는 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왜 생겼겠어? 사랑보다는 증오가 더 일반적인 감정이니까 그런 거지. 사랑보다는 증오가 더 쉽다는 거지.
그래서 영국 소설가 디킨스는 이런 말을 했지. ‘천민들은 상류층 사람들을 존경할수록 그걸 미움으로 표현한다. 질투하고 부러워할수록 그걸 증오로 표현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한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데, 그 증오가 혁명에서 피를 불러온 에너지가 됐다는 뜻이겠지?
“지금 우리 사회의 증오도 그런 에너지가 될 거라는 말을 하려는 거냐?”
한국 정치인들, 특히 대선주자들에게 ‘미움 받을 용기’가 없으면 그렇게는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