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의 햇살과 바람] 설날은 각자의 무게로 온다

입력 2017-01-2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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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라는 말은 참 부드럽다. 입안에 넣으면 금방 녹아 사라질 것 같지 않은가. 근심까지도 눈 녹듯 사라지면서 ‘설’은 그리움으로부터 왔었다. 그리움으로 와서 ‘좋다’에서 ‘흥분’으로 왔던 설의 추억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옷과 음식이 부족했던 초등학교 시절 설은 산타할아버지 같은 것이었다. 설빔이 있고 음식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일은 거의 설레는 축제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는 날이 그 시절엔 있었다. 천이 좋은지 나쁜지 그런 것은 관심 밖이었다. 노란 저고리 푸른 치마를 입혀주며 환하게 웃는 엄마는 그때만큼 이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꽃 그림이 있는 코고무신을 신으면 그 순간 나는 날아올랐다. 천사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완벽한 만족감을 사실 그 이후로 별로 가진 적이 없다. 물질의 만족감도 얼마나 큰 선물인가. 나는 서서히 탐욕을 길러 웬만한 것에는 짜릿한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 엄마가 되면서 설은 나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으로 입장을 바꿔 놓았다. 설은 그리움이 아니라 부담으로 내 가슴을 무겁게 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생이란 이 기간이 가장 길다.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그 긴 세월이 우리가 지겨워도 하고 감동도 하는 삶이라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삶의 짐을 언제 내리나 그 시간을 기다렸다. 그냥 가만있기만 하면 노동과 기쁨과 마음의 근심까지 척척 해결되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이 왔다. 기다리면서도 그 시간은 엄청 멀리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왔다. 난 주인공이 아니라 뭐든 딸에게 묻는다. 이젠 설이 되어도 나는 딸집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먹기만 하면 된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젊은 날 고요한 노후 속에 휴식이 있는 줄만 알았는데 휴식보다는 고독과 견딤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고독도 노동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젊은 날의 지겨움과 노동과 허리 펴지 못했던 지친 일상 속에 삶의 황홀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딸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손주는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나만 살면 그만이다.

근데 그것이 아니었다. 생의 짐을 내려놓는 것은 생명이 그치는 날이다. 건강문제가 따르고 힘을 잃어가면서도 생을 정리하는 단계와, 말을 잘 듣진 않지만 마지막 투혼을 바쳐야 하는 작품이 있고 자녀들에 대한 기도가 남아 있다. 노인이 되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설이 좋아졌다. 세뱃돈을 새 돈으로 바꾸는 날로부터 설은 시작된다. 가족이 모이는 것은 언제나 좋다.

요즘 내 딸들의 이름보다 많이 듣고 부르는 정유라가 열 마리가 넘는 강아지를 독일로 데리고 가는 데 600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돈을 그렇게 소비하면 돈이 아니다. 기쁨도 행복도 너덜너덜해져서 악의 촉수만 높이는 것이 된다. 지겹기도 하고 좌절도 하고 지갑이 늘 달랑달랑 하는 부족감과 미움을 한꺼번에 경험하면서 사랑을 배우는 것, 그래서 아끼고 하루를 잘 가꾸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일상의 기쁨이며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남의 탓은 하지 말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더는 안 돼요!”라는 그 기점을 넘어서려는 온몸의 의지를 길러 바른 정신의 근육을 단단하게 하는 힘, 이번 설로부터 다시 우리 가족들이 만들어야 하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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