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에도 좀처럼 돈이 돌지 않는 이른바 ‘돈맥경화’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 정치ㆍ경제 불확실성에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기보다는 은행에 돈을 쌓아두고 있다. 통화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와 함께 경기 활성화를 위해 과감한 재정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현재 기업이 은행에 맡긴 돈은 383조4597억 원으로 1년 전인 2015년(348조554억 원)에 비해 35조4043억 원(10.2%)이나 늘었다. 연간 증가액으로 2010년(52조523억 원) 이후 5년 만에 최대치다.
기업이 보유한 예금 증가액은 2012년 7조6871억 원에서 2013년 7조7863억 원, 2014년 10조5101억 원, 2015년 26조7894억 원으로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증가세다.
아울러 시중에 떠도는 단기 부동 자금도 지난해 12월 기준 1010조3000억 원을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1000조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말 기준 시중에 풀린 통화량(M2 기준)이 대략 2400조원 인 점을 감안할 때 시중 자금의 40%에 달하는 자금이 순환되지 못한 채 단기 자금으로 몰린 셈이다.
최근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되며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해질 것이라는 전망과는 정반대의 양상이다. 정치ㆍ경제 불확실성이 짙어지며, 기업들이 투자에 망설이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12일 보고서를 통해 최근 대내외 불확실성이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당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해 기업들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2.4%로 2009년 -7.7% 이루 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저금리 정책이 경기 부양으로 이어지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는 진단과 함께, 정부가 재정확대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완화적 통화기조가 가채부채의 증가로 연결되며 전달경로가 막혔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한은에서도 통화정책에 기댄 경제성장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13일 열린 금통위에서 한 위원은 “민간 부분이 가계부채 증가에 따라 악화되고 있는 반면, 정부 부문은 매우 양호한 수준”이라면서 “이러한 구조가 국가 경제 전체적으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만큼 재정의 역할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민간에서도 경기 부진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불확실성이 커서, 저금리 정책이 소비와 투자로 연결되기 어렵다”면서 “우선 정국 안정을 수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정부가 확대재정을 준비해 시장에 신호를 줘야할 때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