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부인(保刀夫人)은 성은 박씨이고,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의 왕비이다. 보도부인의 다른 이름으로는 ‘삼국유사’에는 파도부인(巴刀夫人), ‘울주천전리각석’에는 부걸지비(夫乞支妃)가 전한다.
법흥왕은 527년에 불교를 공인하고, 529년에 살생을 금지시킨 왕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한 후에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고 출가하였는데, 법흥왕비인 보도부인 역시 영흥사(永興寺)를 개창하고 출가하였다. 보도부인의 법명은 법류(法流) 또는 묘법(妙法)이다.
법흥왕비가 영흥사를 세우고, 여승이 된 것은 사씨(史氏)의 유풍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년) 대에 아도기라(阿道基羅)가 신라에 들어와 모록(毛祿)과 그의 누이인 사씨(史氏)에게 불교를 전하였다. 사씨는 신라에서 최초로 여승이 되었고, 영흥사라는 절을 지어서 거주하였는데, 법흥왕비가 이를 따랐던 것이다.
법흥왕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신라 금석문이 있다. 국보 제147호인 울주천전리각석에는 선사시대의 조각·바위그림 및 역사시대의 여러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 법흥왕 12년(525)과 법흥왕 26년(539)에 새겨진 명문이 있는데, 법흥왕 26년의 명문에 보도부인과 지소부인이 각각 부걸지비(夫乞支妃)와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로 기록되어 있다.
보도부인이 그의 딸인 지소부인과 지소부인의 아들인 심맥부지(深麥夫智)와 함께 천전리계곡에 놀러 와서 이전에 온 이들을 추모한 내용을 바위에 새겼던 것이다. 심맥부지는 후에 진흥왕으로 즉위하는데, 울주천전리각석의 명문으로 보아 보도부인이 진흥왕의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주천전리계곡은 돌에 새겨진 여러 문양 및 명문으로 보아 선사 이래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도부인이 천전리계곡에 행차한 목적이 신성지역에서의 종교적 행사를 위한 것이었거나 또는 진흥왕의 즉위와 관련한 정치적 행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6세기의 신라에서는 왕실 여성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될 당시에 불교를 공인하고, 살생을 금지하고, 흥륜사를 창건한 법흥왕만이 주목되었다. 그런데 법흥왕비인 보도부인 역시 법명을 받고 출가하였고, 영흥사를 지어서 그곳에 머물렀다. 법흥왕비는 자신이 출가하여 영흥사에 머물렀던 이유에 대해 법흥왕의 뜻이 아닌 신라 최초의 비구니인 사씨의 행적을 따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보도부인은 신라 초전(初傳) 불교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